여름별장, 그후
유디트 헤르만 지음/박양규 옮김/민음사/224면/2004
세계의 각 나라 문학에도 색깔이 있다면, 독일문학은 어떤 색일까요?
짙은 고동색이나 진회색 같은 색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쉽게 오른 이가 없다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 청춘과 사랑을 노래한 연애소설조차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되고 마는 독일 문학은 주제가 무겁고, 읽기 힘든 만연체 문장의 심각한 문학으로 떠오릅니다. 독일문학의 신성으로
불리는 유디트 헤르만의 ‘여름별장 그 후’는 그래서 새로운 경험입니다.
물론 짧은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읽으면 읽을수록 문장과 문장
사이, 장면과 장면 사이에서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키고, 한편을 끝낼 때마다 웬지 심해 같은 저 마음 깊은 곳까지 쑤욱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것
같은 유영의 느낌이 납니다. 각 단편의 주요 소재 가운데 하나인 젊은 남녀의 만남이 어찌 그리 건조하고 우울한지, 누가 독일문학 아니랄까 봐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그런데도 확실히 다릅니다.
“헌터는 열쇠를 자물통에 꽂아 돌린다. 스위치를 켠다. 등 뒤로 문을 닫는다.
그는 장 본 것을 꺼내놓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는다. 감은 눈 뒤의 어둠 속에서 작은 녹색의 점들이 이리저리 춤을 춘다. 방이 돌아간다.
그것은 항상 돌아간다. 위층 마룻바닥이 삐걱거리고, 어디선가 문 닫히는 소리, 멀리서 엘리베이터가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헌터 톰슨
음악) 짧은 문장으로 이어진 단순 묘사인데, ‘슬프고 체념 어린’ 풍경이 그려집니다.
한때 동거했던 택시 운전사의 갑작스런 전화를
받고 시골집을 보러가는 여인(여름별장, 그 후), 자기 자신에게 관심 없다고 계속 말하는 애인과의 건조한 관계(붉은 산호),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소냐와 무미한 일상을 보내는 이야기(소냐). 그 이야기들에 친숙함을 느끼는 것은 열망을 원하면서도 두려워하고, 과거만이 아름답고 행복했다고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처럼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한번쯤은 찾아왔던 익숙한 감정이기 때문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