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러갔다

카포티 - 누가 그를 죽였나

양화 2006. 6. 22. 17:49

 

얼핏 어디선가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어두운 의자 저 밑인가, 앞자리를 짚고 일어서다가 소스라치고 말았다. 손을 댔다 뗀 곳에 남은 붉은 손자국, 놀라 손바닥을 들여다 보았지만 거기엔 알 수 없는 인생의 행로를 가리키는 손금들이 어지럽게 찍혀있을 뿐이었다. 피 같은 건 없었다.

 

그 바람엔지 마지막 장면이 어떤 것이었는지 잊었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카포티의 뒷모습이었던가. 가지만 남은 겨울나무들이 지평선을 이루던 황량한 캔자스의 풍경이었던가. 어쩌면 카포티의 ‘그 6년’이 끝난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간략한 연대기가 마지막 장면을 머리 속에서 지워버렸는지 모른다.

 

“그는 ‘인 콜드 블러드’를 펴낸 후 죽을 때까지 한 권의 책도 끝내지 못했다. 1984년 그는 알콜중독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흔히 사람들의 삶은 어떤 사건의 전후로 나뉘지만, 어떤 이의 삶은 단 몇 년이 전부가 되기도 한다. 카포티가 ‘인 콜드 블러드’와 함께한 시간은 그의 삶 전부였다. 나머지 삶은 그로부터 파생되었거나 그것의 원인이 된 각주였다

 

당시의 카포티는 인기있는 작가였다. 그는 파티에 초대되고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화제를 주도해간다. 취기와 따뜻해 보이는 노란 불빛, 교양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어느 조용한 시골에서 발생한 일가족 살해사건을 기사로 접하고 그것이 대박감이라는 예감하고 짐을 꾸린다.

 

살인사건의 용의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는 점점 혼란에 빠져든다. 그는 고백한다. “나와 페리는 한 집에서 자라 나는 앞문으로, 그는 뒷문으로 나온 것 같아.” 페리는 털어놓는다. “내가 자신을 죽이길 기대하는 클러터의 눈을 보았을 때, 수치심을 느꼈어요.” 그랬다. 카포티는 페리에게서, 페리는 클러터에게서 자신을 보았던 것이다.

 

마치 마주 세워놓은 한 쌍의 거울처럼, 카포티가 바라본 거울엔 페리가, 페리가 바라본 거울엔 클러터가, 클러터 상대편엔 숀이, 다시 잭이, 넬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책에 대한 욕심으로 페리 일당의 사형을 바라고, 그에 대한 연민과 애정으로 사형을 바라지 않는 것도 카포티였다. 하지만 동시에 넬과 숀과 잭도 그랬다.

 

그들은 그 책임을 카포티에게 떠넘겼을 뿐이다. 인간 속의 잔혹함과 어두움을 명백한 죄인들을 처단함으로써 없는 셈치고, 부정하려는 것뿐이다. 그런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 집에서 태어난 것은 카포티와 페리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다. 나는 손바닥을 다시 들여다 보았다. 패인 손금을 따라 붉은 피가 스며나왔다. 끝없이 상대를 비추는 마주 선 거울 속 어딘가에서 나를 본 것 같았다. 카포티를 죽인 것은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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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에 대해 한 마디만 해야겠다. 특징 없어 보이는 그의 얼굴. 그 말캉한 하얀 두부 같은 얼굴로 어떻게 그렇게 예민한 영혼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는 두부처럼 완벽하게 허물어질지언정 다시 붙여 원상태로 만들 수 있게 깨지거나 부서지지 않는다. 카포티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