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서평

인생이 그림 같다

양화 2006. 6. 1. 15:22

 

 

손철주 지음/생각의나무/338면/2005

처음엔 제목이 너무 거창해서 마뜩찮았습니다. 좀 읽다 보니, 이런 대목들이 눈에 걸렸습니다. “옛 사람들은 빽빽한 것보다 성긴 것에서 풍기는 정취를 옹호한다”, “이상심리의 유희적 지향”, “입맛의 국적은 귀화하지 못한다”라거나 “조선 그림의 델리커시” 같은 요상한 말들 말입니다. 보던 페이지를 접어뒀다가 며칠 지나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냥 잘 읽힙니다. 그 사이 무슨 일이라고 일어난 것일까요?

처음엔 말장난 같던 “강산은 그림이 아니요, 그림은 강산이 아니다”, “난(蘭)스러운 것은 난(難)하고 난(亂)하니 실로 난(爛) 하구나” 같은 말이 책을 덮고 있던 며칠 동안 머릿속을 맴맴 돌았는데 아마도 그 때문인가 봅니다. 곱씹어본 그 말들이 마음속에 조용히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한 겁니다. 떠들 말이 있으면, 무엇이든 떠들라는 저자의 말은, 아하, 난삽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 대해 마음과 머리를 열어두라는 말이었군요.

마음을 열리자 툭툭 던지는 듯한 단정적인 말투, 생뚱맞다 싶은 비유와 낯선 조어에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나라와 동양의 옛 그림을 만나자 그림을 보는 새로운 눈이 열립니다. 정선의 박연 폭포를 ‘듣고’, 굳게 닫힌 주인님 방 앞에서 어정쩡히 멈춰선 계집 종의 발개진 볼도 보입니다. 여기에 일본 막사발, 고독한 백면서생의 애첩 같은 연적, 뜻 없이 그저 그러할 뿐인 기왓장을 다시 보게 됩니다.

책은 서양 현대화가까지 섭렵하는 것도 모자라 스리랑카의 현대 작품에, 프랑스의 한 지체아동이 그린 그림까지 아우릅니다. 그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저자가 미술에 대해 잘 알기 때문일까요? 혼자 묻고 가만히 고개를 흔듭니다. 그는 그림에서 자기 몫의 삶을 보고 있었던 게지요. 화가와 우리의 삶, 그 둘이 만나 찌릿, 하는 장면을요. 칼럼 모음이라 문투와 깊이, 관점이 어수선하다는 것쯤, 인생도 그렇지 않겠냐고 넘어가주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