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에 가고 싶다
"계단을 내려오다가 문득 뒤돌아보았지만 수학 코너는 여전히 한산했다.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조용히 숨쉬고 있었다." p. 180-181
"문제를 만든 사람은 답을 알고 있지. 반드시 답이 있다고 보장된 문제를 푸는 것은, 가이드를 따라 저기 보이는 정상을 향해 그저 등산로를 걸어 올라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수학의 진리는 길 없는 길 끝에,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숨어있는 법이지. 더구나 그 장소가 정상이란 보장도 없어. 깎아지른 벼랑과 벼랑 사이일 수도 있고, 골짜기일 수도 있고." p. 51
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관계란 무엇일까.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관계란, 미운 정 고운 정이며, 켜켜이 쌓아온 함께한 기억의 총합, 그런 것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선 그와 함께한 시간이 필요하고 그 두께가 두꺼워질수록 관계도 견고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일 뿐이야, 허구일 뿐이라구, 라고 말한다면 할 수 없지만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박사는 겨우 80분만을 기억할 수 있지만 너무 아름다운 관계를 맺지 않는가, 라고 생각하면 웬지 부끄러워진다.
박사의 기억은 80분밖에 지속되지 않지만 그는 첫 별을 찾아내고, 숫자와 숫자 사이의 관계들을 아름다운 레이스처럼 풀어내고, 어떤 외부적 상황에도 변하지 않는 정수, 소수, 완전수, 우애수, 약수 그런 것들을 징검다리 삼아 관계를 만들어간다. 박사의 행복이 계산의 어려움에 비례하지 않듯, 그의 행복은 기억의 두께에 비례하지 않는다. 단순한 계산이라도 그 정확함을 함께할 수 있어야 기쁨도 커지듯, 80분이 끝나기 전에 함께한 그 기억의 단순한 싱싱함에 흠뻑 기뻐한다.
"우리 셋이 공유한 소박하고 무수한 풍경만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오히려 선명하게 떠올라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등받이가 갈라져 불편했던 좌석, 처음부터 끝까지 철조망에 매달려 '가메야마'를 외쳤던 남자, 겨자를 너무 많이 넣어 눈물나게 매웠던 샌드위치, 구장 위를 유성처럼 가로지르던 비행기의 불빛 ... 그런 풍경 하나하나를 오래도록 되새기며 그리워했다." 단순하고 소박했던 1년 남짓했던 그들의 시간. 그런 벅찬 기억 하나쯤, 그런 담백한 관계 하나쯤, 수학 공식처럼 단순하고 아름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