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그녀와 나의 공통점

양화 2006. 5. 9. 01:03

 


- 50년간 편집자로 일한 다이애나 애실 -

 

"영역 소유 본능에 불타는 바람직한 출판업자가 되지 못한 데 따르는 장점이 있다면 관심의 초점이 좋은 책의 줄간 여부로 맞추어진다는 점이다. 물론 내 손을 거쳐 출간이 된다면 좋겠지만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간다 하더라도 세상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p. 120

 

"... 출판업자와 작가의 관계는 내 생각처럼 그렇게 편한 관계가 아니다... 어떤 출판업자의 입장에서는 투자금 회수가 제1의 관심사일 수 있다. ... 작가의 입장에서는 출판업자의 열렬한 반응이  고맙겠지만 책을 제대로 만들고 제대로 팔아야 애정이 유지된다. 그런데, 작가가 생각하는 '제대로'의 의미는 출판업자의 기준과 다를 수 있다. ... 작가들 중에서 일부는 겉으로 예의 바른 척하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출판업자를 양복장이처럼 생각한다. 맡긴 밀만 제대로 해주면 고마운 사람, 다리 안쪽의 길이와 '그것'을 오른쪽으로 두는지 왼쪽으로 두는지 알고 있을 만큼 가깝지만 저녁 식사에 초대하지는 않을 사람으로 말이다."   p. 116-117

 

"... 두 작품을 읽으면 책이라는 존재가 내 인생에서 왜 그렇게 엄청난 의미로 다가오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책을 사랑하는 이유는 위대한 문장에 희열을 느껴서라기보다 내 좁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 복잡한 인생에 대한 감각을 넓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잡아먹을 듯한 인생의 어둠과 고맙게도 그 속을 애써 뚫고 나오는 빛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p. 101

 

그대로 두기, 다이애나 애실 지음

 

아직 내 정체성이 무엇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편집자인가, 출판업자인가.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흔쾌하지 않다. 내겐 독자의 자리가 아직도 가장 편하고 행복하다. 그래도 사람이 책만 읽으며 무위도식할 수 없으므로 직업적으로 날 정리해보면 편집자에 가까운 것 같다. 나는 이 두 역할에 혼란이 오는 사람에게 이 책을 바로미터로 써볼 것을 권하고 싶다. 안드레 도이치사의 창립부터 매각 때까지 한결같이 편집자의 자리를 지켰던 다이애나 애실의 자서전 '그대로 두기'를 말이다.

 

책을 읽자마자 너무 재미있었는데, 그 이유는 단순했다. 애실 여사도 돈 계산과 숫자에 약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어디서건 좋은 책으로 출간되기만 한다면 내가 내지 못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고. 동업자이자 안드레 도이치사의 경영자였던 안드레 도이치라는 인물의 특성과 비교해보면 자신이 출판업자에 가까운지, 편집자에 가까운지 잘 알 수 있다.

 

너무나 영국적인 작품들을 많이 낸 출판사라 이 출판사가 출간한 책의 작가들은 생소하지만 책 자체의 흥미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좀 진지하게 접근한 작가 여섯 명 가운데 알 만한 이는 우리나라에도 몇 권이 번역된 V. S. 나이폴 정도인데, 작가를 알고 모르고 간에 작품의 내용보다 편집자가 작가를 만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에 성가시지는 않다. 그리고 안드레 도이치사가 몰락해가는 과정은 지금의 우리 출판계 현실과 많이 비슷하다.

 

20년 간격으로 출판역사가 반복되는 느낌이다. 책을 읽고 나서 나는 최근에 내가 한 중요한 결정이 전적으로 옳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우겨서 될 일이 있고, 아닌 일이 있는 법이다. 더 나아가지 않고 이쯤에서 주제를 파악하고 행복해지는 길을 택한 내게 조용히 위로와 격려를 보냈다. 남은 일들을 해결하고 처리하는 일이 쉽진 않겠지만, 홀가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