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것

양화 2006. 4. 22. 19:19

 

 

사람을 사람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은 '과거'라는 것을 야스타카는 깨달았다. 이 '과거'는 경력이나 생활이력 같은 표층적인 것이 아니다. '피의 연결'이다. 당신은 어디서 태어나 누구 손에 자랐는가. 누구와 함께 자랐는가. 그것이 과거이며, 그것이 인간을 2차원에서 3차원으로 만든다. 그래야 비로소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를 잘라낸 인간은 거의 그림자나 다를 게 없다. 본체는 잘려버린 과거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져버릴 것이다.

 

이유, 미야베 미유키 지음, p. 553

 

700쪽에 육박하는 물리적으로 매우 무거운 책이었음에도 단숨에 읽어버렸다. 책의 시작은 부동산 거품이 꺼진 직후 일본의 고급 주상복합아파트 반다루 센주기타 뉴시티 웨스트타워에서 4명의 일가족이 살해되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보통의 추리소설이라면 누가 저질렀나를 중심으로 단서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형태겠지만, 이 책은 달랐다. 전혀 연관이 없어보이는 몇몇 가족들의 이야기를 방사상으로 풀어놓는다. 처음엔 범인이 누군가에 대한 단서를 전혀 주지 않는 이야기에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한참 읽어가다 보면, 그건 중요한 게 아니란 걸 깨닫게 된다.

 

나오키상 수상작으로 만장일치로 선정될 때, 심사위원단이 "현대 일본의 빛과 어둠을 드러내고 사회와 인간을 폭넓게 그린 발자크적인 작업'이라고 했다는데 아주 정확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살인에도 수많은 사회적 공모자가 있다는 말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과거와 현재, 세대 차이, 빈부격차, 현대 사회의 어두운 측면들. 인간이라는 것이 무엇으로 이뤄져있는지 환멸과 함께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어느 구절에서건, 인간에 대한 이해가 반짝여 수많은 사람 가운데 대강 넘어간 인간은 없다. 시점도 빈번히 움직이지만 그럼에도 전혀 혼란스럽지 않다.

 

윗 구절은 나중에 이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밝혀지는 한 남자에 대한 묘사다.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 집요하게 그려져야 할 인간을 희미한 테두리로만 그린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반다루 센주기카 뉴시티 웨스트타워에는 그 유령이 출몰한다. 그 스스로 밝힐 수 없기에, 어느 곳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은 과거 없는 인간. 그는 살아있을 때조차 유령이었던 인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에 대해 동정도, 증오도, 애정도 품을 수가 없다.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