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록
이태준 지음/범우사/168면/1999
상허 이태준은 한때 우리가 만날 수 없는 작가였습니다. 월북작가가 해금되었던 1988년 7월 이후에 대학에 들어간 저는 신문 연재 소설을, 잡지에 실린 원고를 그대로 복사해 묶어놓은 책들로 그들을 처음 만났습니다. 어떤 글자는 참혹하게 지워져 있고 어떤 부분은 이지러져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운문은 지용, 산문은 상허”라던 그 상허와 지용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문고본 ‘무서록’, 순서없이 적은 글을 읽게 되었지요.
처음엔 벽, 물, 밤, 죽음, 산, 고독, 여명, 난 등 마치 고등학교 백일장에서 주어지는 시제 같은 제목들에 약간 실망스런 기분이었습니다. 산문에는 상허라더니, 제목이 뭐 이리 싱겁나 그런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모두 42편의 수필 가운데 첫 꼭지, ‘벽’을 읽습니다. “뉘집에 가든지 좋은 벽면을 가진 방처럼 탐나는 것은 없다. 넓고 멀찍하고 광선이 간접으로 어리는, 물속처럼 고요한 벽면.”
그 두 줄에 벽이라면 으레 떠오르는 수사와 비유들이 머릿속에서 하얗게 사라졌습니다. “그런 벽면에 낡은 그림이나 한 폭 걸어놓고 혼자 바라보고 앉았는 맛, 더러는 좋은 친구와 함께 바라보며 화제 없는 이야기로 날 어둡는 줄 모르는 맛, 그리고 가끔 다른 그림으로 갈아 걸어보는 맛. 좋은 벽은 얼마나 생활이, 인생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일까” 벽을 얼마나 오래, 어떤 생각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이런 문장이 써지는 것일까요?
가을꽃들은 아지랑이와 새소리를 모르고, 그들의 슬픔이자 명예는 찬 달빛과 벌레소리에 피고 지는 것이라던, 우썩우썩 자라던 힘이 한밤에 정지한 듯, 빛 낡은 꽃송이들이 씨를 물고 수그린 파리한 화단에서 볼 것은 돌뿐이라던 가을 정경은 스산한 가을 기운까지 어느새 몰고 옵니다. 작고 얇은 이 책 한 권을 책꽂이에 꽂아두었다가 아무데고 펼쳐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이 글 읽는 사람의 보람이고 명예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