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 지음/정영목 옮김/청미래/288면/2000
가끔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미완이거나 추억일
때만 온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거기에는 흔히 사랑의 해피엔딩은 결혼이라는 암묵적인 동의에 저항하는 마음이 숨어있습니다. 그럼,
결혼에 이르지 못한 사랑은 모두 실패한 사랑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겠죠.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사랑의 감정이라는
실체를 철학적으로 해부한 책입니다.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5840.82분의 1의 확률로 옆 좌석에 앉게 된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나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극적인 확률은 낭만적 사랑의 시작일 수 있는 운명론을 자극하지요. 그 운명론은 대상을
이상화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특별한 그 사람과 함께하는 모든 것은 당연히
평범하지 않습니다.
남들은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할 그녀의 벌어진 치아가 정말 매혹적으로 느껴지고,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은 밖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띠게 됩니다. 그 사랑이 어느 순간, 변합니다.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래서 시간이 모든 걸 부식시켜
고통조차도 잊게 할 거라는 많은 사람의 예언에 저항하듯, 죽음을 생각합니다. 그것만이 사랑의 불멸과 중요함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가 죽었냐구요? 전 이 말에 대한 답을 이렇게 하렵니다.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이라고요.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나’의 갈망이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을 빚어내며,
우리의 욕망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구체화”된다고요. 그러니, 우리는 곧 또다른 사랑을 찾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