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을 다녀가는 것 가운데 바람 아닌 것이 있으랴
한승원 지음/황금나침반/302면/2005
서울을 떠나 고향 장흥의 바닷가에서 살아가고 있는 노소설가의 일상이 평화롭습니다.
차밭을 일구고, 불현듯 바닷가를 나가 거니는 모습에서 인생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 보여주는 고요와 안정이 있습니다. 그 뒷자리를 조용히 따라
걸어가노라면, 노소설가의 그동안이 삶이 스쳐갑니다. 젊은 소설가는 깜깜한 바다 위를 홀로 배를 저어가며 자신의 힘과 지혜가 아니고는 벗어날 수
없던 그 바다 위에서 자기 삶을 기어코 건져내리라 마음을 다잡습니다.
가난한 농부 아버지의 삶이나 이어가게 될 거라는 친구의 손금
평에 바늘로 찔러 손금을 바꾸는 젊은 시절의 소설가도 있습니다. 아버지가 잘라준 머리가 싫어 아예 박박 밀어버리는 고집스런 모습이 있습니다.
겨우 하객 여덟을 두고 치른 초졸한 사찰 결혼식에서 포근함을 느끼는 소설가의 모습도 있습니다. 평생을 가난한 집의 안주인으로 살았던 아내에 대한
소소한 감정과 연민도 있습니다. 아이들에 대한 자상한 걱정들도 있습니다.
여섯 사람이 앉아있는 지하철 좌석에서 자기 자리를 찾으려면
엉덩이를 들이밀고 자기 존재를 알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게 세상에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방법이랍니다. 무엇도 자신에게 저절로 온 것은 없었다던
노소설가의 깨달음답습니다. 하지만 제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세상에 살다 간 것 가운데 바람 아닌 것은 없다는 그 말입니다. 늙어가면서 스스로
소멸의 기운을 느끼는 소설가는 말합니다.
이제 기억하던 사람들조차 바람이 되어버릴 거라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래서 지금
스쳐지나가는 것은 무엇이나 아름다워집니다. 밤을 지새워우는 풀벌레 소리, 파도가 곧 지워버릴 연인들의 발자국, 물 흐르듯 흘러가는 계절의 흐름
모두요. 그래서 소설가는 이제 그만 조금 게을러져도 좋을 그 나이에도 감성에도, 지성에도, 노동에도, 열정에도 게을러지지 않는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