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지음/김종길 옮김/572면/민음사/2005년
묘한 마력으로 독자의 시선과 마음을 끌어당기는 ‘폭풍의 언덕’은
작품도 작품이지만, 그 저자를 둘러싼 뒷이야기에 더 끌립니다. 어머니를 여의고 황량한 목사관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는 세 자매, 그 가운데서도
에밀리는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것만으로 벌써 남다른 비의를 숨기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폭풍우 몰아치는 언덕의 괴괴한 저택을 맴도는
캐서린의 유령이 에밀리와 겹쳐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때는 18세기 말, 영국 요크셔의 외딴 곳에 살고 있던 언쇼 집안에
부랑아 히스클리프가 들어옵니다. 히스클리프가 가진 야성은 빅토리아 시대의 무겁고 위선적인 분위기에 파문을 불러옵니다. 히스클리프 못지 않은
격정을 갖고 있던 캐시는 그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빅토리아식 신사인 에드거 린턴과 결혼하게 됩니다. 비극은 거기서 싹틉니다. 사랑이 컸던
만큼 배신의 아픔도 컸던 히스클리프는 복수에 나섭니다.
3년 후 돌아온 히스클리프 앞에는 아내를 잃고 인사불성이 된 캐서린의 오빠가
있고, 남편을 사랑하면서도 히스클리프에게 단호하지 못한, 여전히 매력적인 캐서린이 있습니다. 그들을 대상으로 한 복수는 본능적이고 야만적인 그의
성품을 반영하듯 철저하고 무섭습니다. 그런데도 그에게 연민이 생기는 것은 왜일까요? 그의 사랑은 어쩌면 치장되기 이전의 날것 그대로의
사랑이어서일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낭만적 사랑은 19세기 근대의 발명품에 불과하다는 걸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깎아지른
절벽, 미친 듯 불어대는 바람에 날카롭게 쓰러지는 히스의 숲. 끝없이 황량한 벌판에 휑한 저택. 그 창가를 떠돌며 죽어서도 서로를 갈망하는
연인의 울부짖음은 책을 놓은 후에도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다른 자매들에 비해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다던 에밀리 브론테가 슬쩍 궁금해지는 것도
틀림없이 그 여운 때문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