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예찬
다비드 르 브르통 지음/김화영 옮김/274면/현대문학/2002년
아침 안개인 듯, 흰빛이 산길을 감싸고 있습니다. 세월의
마디만큼씩 뻗어나간 가지들을 내민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적당히 휜 좁은 길. 보자마자 한 걸음 내딛고 싶어집니다. 금세 내 몸을 감쌀 상쾌한
공기, 발밑에서 바스락 부스러질 낙엽들, 문득 깊은 숨이 쉬어집니다. <걷기 예찬>의 표지는 어느새 우리의 손과 다리가 허공을 휘젓게
만들고 숨을 쉬어본 적 없다는 듯 다시 쉬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이 책은 말랑말랑한 풍경을 담은 도보여행서 같은 게 아닙니다.
이 책에서 걷기는 “사물들의 본래 의미와 가치를 새로이 일깨워주는 인식의 한 방식이며 세상만사의 제 맛을 되찾아 즐기기 위한 우회적
수단”입니다. 걷기 시작하면 존재의 조건은 달라지죠. 들고 가는 것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즐겁게 걸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우리 안에 난 길들을 기웃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뿐인가요? “오솔길은 물론이지만 세상의 모든 길은 땅바닥에 새겨진 기억이며
오랜 세월을 두고 그 장소들을 드나들었던 무수한 보행자들이 땅 위에 남긴 잎맥 같은 것, 여러 세대의 인간들이 풍경 속에 찍어놓은 어떤 연대감의
자취” 같은 것이기 때문에 길 위에서 우리 내면의 길 뿐 아니라 수세대 동안 축적된 사람들의 흔적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걷기는 침묵을
횡단하며, 주위에서 오는 소리를 음미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나무 사이를 수런거리며 지나가는 바람소리, 바다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을
찾아가고 있는 물소리, 자기 존재를 드러낼 만큼만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 침묵조차도 하나의 감각으로 전해지고 눈은 속도 때문에 놓쳤던 사람들을
바라보며 몽상도 시작합니다. 그래서겠죠. 이 책에서 인용한 수많은 도보에 대한 빛나는 글들은 이렇게 끝맺습니다. “길의 끝이야 아무려면 어떤가”
걷는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