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서평

행복한 책읽기

양화 2006. 4. 13. 03:13

 

김현 지음/282면/문학과지성사/1999년

김현 선생님을 생각하면 좀 엉뚱하지만, 그 일화가 생각나곤 합니다. 어린 나이의 김현을 평론가로 발탁한 양주동 박사를 찾아뵙던 날, 김현은 집 열쇠를 잊은 양주동 박사와 연탄광에 마주 앉았답니다. 하필 연탄광이라니! 권위야 별로 안 섰겠지만 하늘 같은 학자를 마주한 김현 선생은 단단히 얼었겠지요. 다소곳이 큰 절을 올리자 근엄하게 앉아있던 양주동 박사가 이렇게 말했다지요? “자네는 자네가 천재인 줄 알겠지? 아닐세, 천재는 날세.”

죽기 전 4년간 쓴 천재의 독서일기. 이 정도면 이 책의 매력적인 아우라로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책을 펴드는 순간, 사람들은 천재란 이름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붙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시, 소설, 비평서와 사회과학, 철학, 무수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때론 진지한 사유를, 때론 정치한 비평을 펼쳐보입니다. 일기에서조차 비평가로서의 중무장을 풀지 못하고 읽고, 생각하고, 쓰는 선생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에도 이 책을 숨 막히지 않게 만드는 것은 선생의 따뜻한 시선입니다. 당시에 이미 대가였을 김지하 시인의 ‘무화과’라는 짧은 시를 살핀 선생의 비평을 보십시오. 무화과는 말 그대로 꽃(눈에 보이지 않는)을 피우지 않은 채 열매를 맺습니다. 하지만 무화과를 쪼개보면, 그 안은 꼭 꽃처럼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그것을 ‘속꽃’이 피었다고 써내려간 시인의 마음에 김현 선생은 어느덧 탄복하고 있습니다.

김현 선생이 읽은 책은 그에게 무화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런지요? 어떤 때는 작가의 치기가, 또 다른 때는 설익은 관념이 거슬린다고 하면서도 속꽃을 진심으로 보려고 했던 마음이 엿보이는 것을 보면요. ‘육체가 정신의 주인인 것 같다’고 우회적으로 표현한 육체적 고통, 점점 커지는 어두운 방처럼 두렵던 죽음도 그 마음을 훼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분이 가고 난 후에 작가가 된 모든 분들께 아쉬움의 건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