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여진 그림, 그려진 말
푸른 깃대 부분, 1953
"마침내 나타난 것이다! 이제는 더이상 사실주의도, 사실적 대상도, 선도, 형태도, 윤곽도,
붓질도, 형태도, 감정적 환기도, 그림 틀도, 벽도, 화랑도, 미술관도, '평면성'이라는 신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대하는 끊임없는 고뇌도, 관람객의 필요도, 투영된 아집도 남아 있지 않다.
단지 인간일 수 있고 아닐 수도 있으며 거기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수신자'와
누구도 해당될 수 있지만 아무도 나일 수도 있는 3인칭의 '화가 the artist'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화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심지어 존재마저도 요구되지 않고 있다(가정법 속에서 존재마저
상실되고 있다). 그리고 이 절대적으로 냉정한 퇴위(退位)의 순간, 이 무관심한 고사(枯死)의
순간에 현대미술은 그 최후의 탈주를 한 것이다. 현대미술은 점점 좁아지고 죄어오는 나선형의
계단을 끝없이 기어오르다가 수지상돌기 시냅스의 마지막 접합부에서 그때까지 남아있던
자유의 1에르그(1다인의 힘이 물체에 작용하여 1센티미터만큼 움직이는 에너지의 단위)로
미술 자체의 궁극적 구멍을 통해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반대편 출구히에서 '미술이론'으로
변신해서 나타난 것이다! 순수하고도 순수한 '미술이론', 종이 위에 적힌 문자, 시각적 환상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은 문학 - 평면으로, 보다 평면으로, 가장 완전한 평면으로 - 그리고 천사와
정령처럼 신성하고 비가시적인 비전으로......
현대미술의 상실, 톰 울프 지음, p. 123-124
거대한 캔버스에 마구 페인트를 흘려 놓거나 직선을 이리저리 그어놓은 그림 앞에서
망연자실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은 알 것이다. 뭔가를 찾아내려고 머리를 갸우뚱대도
찾아지지 않던 그 무엇 때문에 자괴감에 몸 떨어본 사람은 알리라. 기자 출신 저자 톰 울프도
아마 그랬으리라. 추상표현주의의 대가라는 잭슨 폴록의 그림 앞에서 이 그림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나, 망설이고 머리를 쥐어짰을 것이다.
'현대 미술의 상실'은 추상표현주의부터 팝아트, 미니멀리즘, 옵아트, 포토리얼리즘까지
현대 미술의 뒤통수를 치는 책이다. 추상미술의 번성이 로젠버그나 그린버그, 스타인버그 같은
이론가들(아니, 짰나? 이름이 다 버그로 끝나나?)에 의해 '설명'되면서 그 의미를 갖게 되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예술가들조차도 마음으로는 부와 명성과 여자를 원하면서도 스스로
부르조아로 보일까 봐 경계하며 예술가의 자유를 장식품으로 전시하고 다닐 뿐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한다. 가령, 이런 고백은 어떤가?
"솔직히 말해서 요즘엔 이론이 없으면 그림을 봐도 모르겠어"
힐튼 크레이머가 얼떨결에 실언을 하고야 말았다.
그러니, 현대 추상작품을 보고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주눅들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