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늙는다는 것

양화 2005. 9. 14. 11:24


 

... 그림 그리기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아도 되고, 아주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진전된다. 캔버스는 시간의 시샘, 혹은 서서히 밀려오는 쇠락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보호막처럼 서 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행복한 것은,

외롭지 않기 때문이다. 빛과 색, 평화와 희망이 끝까지 함께,

적어도 거의 마지막 날까지 함께하기 때문이다.

 

윈스턴 처칠 <처칠, 사진 같은 초상화>(1974)  p.87

 

이상하게도, 지금 현재의 나이가 항상 받아들일만 하다는 것이었다.

40대에는 다시 20대가 되고 싶지 않고, 50이 되면 다시 서른이 되고 싶지 않은 것처럼

일흔이 되고 나면 다시 50대로 돌아가고 싶지가 않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 있든

상관없이, 그 시기에 맞게, 괜찮은 기분이 든다. 아마도 각각의 시기마다

그때만의 장점과 단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들면 기력이 떨어지고

시간에 대한 유연한 대처 능력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남아있는 시간에도

그것이 기쁨이든 고통이든 그 시기만의 가치를 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것을

얻기도 한다.

 

더블라 머피 p. 63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날, 존 버닝햄 엮고 그림

 

내가 하도 떠들고 다녀서 아는 사람은 아는데, 나는 늙으면 그림을 그리고 싶다.

수년 전 보았던 브레송 전시회에서 피카소를 비롯해서 90 넘게 산 화가들 사진을 보면서 

나도 늙으면 그림 그려야지, 굳게 마음 먹었다. 그들의 얼굴이 무척 행복해 보여서였다.

그런데, 이 책에서 윈스턴 처칠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외롭지 않아 행복하다고..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날>은 서툰듯, 낙서한 듯한 버닝햄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책이라는데, 하면서 선뜻 집어들 만한 책이지만 실은 그의 책이 아니다.

편집자와 함께 노년에 관한 각종 글 - 책, 잡지, 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국회의사록이나

생활광고까지, 문인이나 예술가는 물론 축구선수나 무기수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모은 책이다. 사소한 옛날 것 모으기 좋아하는 영국 사람들답다.

읽다보면 킥킥 웃음이 나는 부분도 있고, 늙으면 이렇구나 하는 부분도 있다.

아직 늙지는 않았지만 정말 그렇지 않을까 공감되는 부분도 있는데,

가령, 발은 우아하게 늙는 법이 없다든가, 늙어서 할 수 있는 운동은 안경 찾아

삼만리 밖에 없다든가 하는 것은 정말 그럴 것 같다.

 

그레타 가르보가 두 번밖에 수술을 안 했다든가, 윈스턴 처칠이 한 파티에 가서 

로트렉이 그린 늙은 창부를 보고 '먹음직스럽다'고 했다든가, 고양이가 죽으면

벼룩들이 제일 먼저 떨어져 나온다든가, 늙으면 육체적인 즐거움 앞에서 정신적인

것은 시들해진다든가, 나이가 들면 높은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든가,  스스로

무너지는 구세계는 없다든가 하는 사소한 뒷이야기와 사적인 깨달음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도 즐거움.

 

책을 읽으면서 새삼 실망한 게 있는데, 늙으면 눈이 꽤 나빠져 아무것도 읽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 늙으면 책 많이 읽어야지, 했는데...

위로 받은 것도 있다. 아직까지 자전거를 타지 못해서 언젠가는 꼭 배우리라

마음 먹고 있는데, 톨스토이는 예순 일곱에 자전거를 배웠단다! 톨스토이도

그랬는데, 하는 식의 위로가 아니라 그게 예순 일곱에도 시도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다행스러워서다.

 

여성이라면 간호사이자 수녀, 의학전문기자였던 클레어 라이너의 글(243쪽)을

읽어보길 바란다.(남자가 읽어도 된다) 늘 느끼는 거지만 나이든 여성의 글은

언제나 좋다. 통찰력이 넘치면서도 권위적으로 가르치려 들지 않고 어느새 스며들어

조용히 설득한다. 그녀의 글 역시 그렇다. 개인적인 바람인데, 나이든 여성들이 글을

많이 좀 썼으면 좋겠다.

 

참, 뒷부분에 왜 이렇게 오자가 많은 것이냐.. 그냥 묻어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서

자꾸 눈에 거슬린다. 파운드를 파우드라고 쓰질 않나, 콘서트를 콘서티라고 하질 않나,

대화를 대합이라고 하질 않나.. 인터넷 서점에 확 신고할까? 오탈자 코너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