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일기

읽는 삶 만드는 삶 - 책은 나를 나는 책을

양화 2017. 5. 1. 14:36



지난 한 해 내내 마음 쓰고 신경 쓴 책이 나왔다. 하도 오랫동안 주무르고 들여다 본 글이라 막판에는 지겨운 마음이 들었는데 책으로 나와서 이제 사람들에게 읽히겠거니 생각하니까 애틋해진다. 독서일기류의 책들은 이미 너무 많다. 게다가 대부분 좋은 책이고 저자들도 훌륭하다. 시작부터 주눅이 든다. 이 책을 읽고 좋다는 사람도 있겠고, 별로라고 생각할 사람들도 있겠지 하면서도 어쨌든 읽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은 시간이 가치 있었으면 하고 소심하게 바라본다. 


지난 주에 한겨레신문 이유진 책지성팀 팀장님께 연락을 받았다.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이 책에 워낙 개인적인 이야기가 많아서 가까운 사람들에겐 읽기를 권하기가 쑥스럽던 참이라 나와 일면식 없는 사람을 실물독자 1호로 만나게 되어 즐거웠다. 인터뷰 장소였던 한겨레신문사 내 작은 카페의 마당에는 색색의 철쭉이 한창이었다. 이 책을 가지고 인터뷰 하기는 처음이라 많은 부분에서 준비가 덜 되어 기자님께 죄송하고, 또 아쉬운 점이 있긴 했지만 행복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책을 읽은 기자님의 첫 감상에 나와 이 책을 돌이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기자님은 이 책이 다른 편집자들이 쓴 책과 달리 "한 수 가르쳐주마!"하는 태도가 보이지 않아 다르게 읽혔다고. 그 말을 듣고 뒤늦게, 아, 그게 내 태도였구나를 깨달았다. 나는 편집자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꼭 어떤 자질을 가져야만 유능한 편집자라는 생각은 없다. 그게 이 책이 독자에게 전해 주었으면 하는 거였다.


편집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내 생각에, 책을 좋아하는 것뿐이다. 책을 좋아하지 않고도 물론 책을 만들 수 있고 그런 사람들도 편집자의 외연을 넓힐 수 있다. 하지만 이왕이면 좋아하는 사람이 더 행복하게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 외에 편집자들은 모두 저마다의 자질과 재능으로 출판과 책의 세계를 넓혀간다. 그런 점에서 후배 편집자나 선배 편집자의 경계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기자님이 후배 편집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는지 물었던 것에 출판이 아무리 열악해도 애정을 잃지 말아줬으면 하고 말했는데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건방졌다. 나는 one of them일 뿐인데.


나는 틀림없이 좋은 사람이니 내가 혹시라도 영향력을 가지게 되면 좋은 일을 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바라본 적이 있다. 내가 편집자로 괜찮은 사례나 롤모델이 되면 여성 편집자들 전체에게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요즘 들어 (나이가 들어서겠지만) 내가 원하는 바가 더 선명해진다. 나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나 어떤 판으로부터가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들에게 믿을 만한 사람이 되고 싶다. 조직에서 유능한 사람이 되기 보다 자신을 성찰할 줄 알아서 강하고 믿음직한 사람이 되고 싶다.


책과 별로 안 친한 남편이 볕 좋은 일요일, 짬을 내어 책을 읽는다. 아내가 쓴 책이라고 특별 대접이다. 읽다가 문득 묻는다. "그래서 이 책에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음, 편집자라는 건 있으면서 없는 사람들이라는 거? 유능한 편집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저마다의 편집자가 있다는 거? 그리고 여기 소개한 책들은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거? 책보다 삶과 사람이 훨씬 중요하다는 거? 그 정도? 책을 쓰는 동안, 그리고 책이 나온 후로 더욱 트렌드를 선도하고 세상을 호통치거나 위협하는 책보다 세상에 애정을 가진 한 인간을 만날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독자들도 책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더 많이 만나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