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와 그의 아내 팻 캐바나
영국 소설가 줄리언 반스가 아내이자 탁월한 편집자였던 아내 팻 캐바나를 잃고 쓴 소설. 삶의 층위들이라는 제목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 상공과 지상, 지하로 연결되는 구성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하도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이라 그 외 감상은 모두 휘발되고, 밑줄 친 몇몇 구절만 남았다. 몇몇 구절들은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주며 곱씹게 된다.
이제는 1858년 가을, 프티 비세트르에서의 나다르의 성공담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현존하는 항공 촬영 사진들은 질적으로 그럭저럭 봐줄 만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그 시절에 만끽한 흥분을, 우리는 상상으로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장할 무렵의 세상을 대표한다. 어쩌면 그것은 지나치게 감상적이거나 희망적인 생각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세상은 성숙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춘기적 상태와 짜릿한 발견의 순간을 영원히 지속하면서 성장하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는 인식의 변화가 일어난 한순간이었다. 동굴 벽에 흔적으로 남은 인체의 형상, 최초의 거울, 초상화의 발전, 사진의 과학과 같은 진보 덕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그와 함께 진실도 더욱 늘어났다. 그리고 설령 세상이 프티 프세트르에서의 사건을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 해도, 그 변화는 무위로 돌리거나 원상으로 회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비상의 죄는 사함을 받았다. 45-46
... 아내가 두 번째로 내게서 빠져나가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처음엔 현실에서 그녀를 잃고, 그다음엔 과거에서 잃는 것이다. 기억-마음의 사진 저장소-이 쇠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입을 다문 사람들'은 더욱 미움을 사게 된다. 그들은 당신 인생에서 그들이 새로이 기능하게 되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그들이 그저 친구가 아니라 확증을 가진 증인이 되어주길 바란다. 지금까지의 당신이 살아온 바를 가장 많이 지켜본 사람은 이제 침묵하게 되었으니, 돌이켜 기억할 때 의심이 드는 건 불가피한 일이다. 그런 이유에서 당신은 친구들이 다만 흘긋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별 생각을 가지고 본게 아니라 해도, 과거에 본 당신-당신 부분 두 사람-이 어땠는지 당신에게 얘기해주길 바란다. 내적으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뿐 아니라 겉으로 보였던 면까지 얘기해주길 바란다. 지금 당신의 상태로는 불가능한 정밀한 잣대로 당신을 증언하고, 확증하고, 기억해주길 바란다. 161-162
...높이도, 정확함도, 초점도 잃어버린 이즈음, 우리는 예전처럼 각별하지 않고, 인생 자체를 찍은 사진처럼 다가오지도 않으며, 그저 사진을 찍은 사진인 것 같은 느낌 뿐이다. 아니, 달리 말해볼까. 당신의 인생, 당신의 전생에 대한 당신의 기억은 템스 강 어귀 어딘가에서 프레드 버나비, 콜빌 대위, 미스터 루시가 목격한 평범한 기적과 닮았다. 그 셋은 구름과 태양 사이에 있었고, 버나비는 이제 막, 대담해져서 코트를 벗고 셔츠 바람으로 만족스레 걸터앉은 터였다. 셋 중 하나가 그 현상을 먼저 보고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태양이 양털구름층 위로 그들이 탄 기체의 이미지를 비추고 있으며, 가스 주머니, 바구니, 세 조종사의 윤곽선이 뚜렷하게 떠올라 있다. 버나비는 그것을 '거대하게 큰 사진'에 비유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그토록 뚜렷하고 그토록 확실하지만 결국 이런저런 연유로, 기구가 움직이고 구름이 흩어지고 태양이 각도를 바꾸기 때문에, 그 이미지는 영영 잃어버리게 되고, 오직 기억 속에서만 살아 후일담으로 변해버린다. 182-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