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의 주먹 - 어른 없는 세계
난 소년들의 삶에 관심이 많다. 소년들만을 가진 엄마여서이기도 하겠지만 소년이 잘 커야, 세상이 더 나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외도 없진 않지만 소녀들과 달리 소년들은 더 큰 문제를 만드는 경향이 있다. 지난 주엔가 가출소년들의 실태를 다룬 시사 프로그램을 보고 마음이 아파 혼났다. 우리 아이만한 아이들이 굶기를 밥 먹듯 하고 잠잘 곳을 찾지 못해 몇날 며칠 거리를 헤매면서도 집보다 거리가 낫단다. 카메라를 든 방송사 사람에게 험악한 욕지거리를 하다가 치킨을 사주겠다고 하자 거짓말처럼 양순해져서 언제 다시 먹을지 모를 치킨 몇 마리를 앉은 자리에서 한 조각 남김없이 깨끗하게 비우는 아이들, 처음의 경계를 풀고 자기 얘기와 그동안의 거리 생활을 순순히 털어놓던 아이들은 다음 날, 일거리를 찾아 제대로 살겠다며 경기도 인근으로 떠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그 모습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고 한 번 빠져들면 밀리지 않기 위해 더 잔혹하고 무자비해질 수밖에 없었던 그 애들에게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첫 번째 영화를 보면서도 생각했던 거였지만 두 번째 보면서 계속 드는 생각은, 이 아이들을 지켜주고 보호해주어야 할 부모와 선생님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였다. 이 영화에선 청소년들이 나오면서도 그들 부모가 나오지 않는다. 얼핏 나오는 부모는 무력하거나(이상훈의 아버지), 형식적인 보살핌으로 다했다고 생각하거나(손진호의 아버지), 속 썩이는 자식 덕에 일찍 세상을 등졌다.(신재석의 부모), 등장하는 선생님도 다른 학교의 문제 학생이 찾아오자 다른 선생님께 연락하라며 자리를 피하거나 소풍에서 아이들과 다르게 행동하는 아이들을 그냥 모른 체하라는 무기력한 선생님들 뿐이다. 어린 덕규, 재석, 상훈, 진호에게 어른들의 세계란 그런 곳이었다. 불의를 모른 체하고, 문제가 생기면 회피하고, 돈과 권력으로 해결하는 세계. 국가의 이익을 위해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밀어버리는 무도한 세계, 자신과 다른 입장을 지위와 돈을 이용해 뭉개버리는 세계다.
실력보다 경험이 많아야 한다며 "세상 이치가 다 그런 거 아니겠냐"던 권투 심사위원이나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고도 돈이 많은 아이를 빼내주고 걱정해주는 경찰 고위직 간부, 아이들에게 기회를 주겠다며 범죄의 세계에 밀어넣고 자신의 실적만 챙기는 형사, 그런 어른들을 통해 그런 세계밖에 보지 못했고, 그런 세상으로부터 상처 받은 아이들은 자라 각기 그런 세계를 대변하는 인물이 된다. 아이들이 사고를 쳐서 구치소에 들어갔을 때, 진호의 아버지는 돈과 지위로 아들을 빼내오고 나머지 세 아이는 형사의 꼬드김에 빠져 조직 패거리에 발을 내디딘다. 거기서 조직의 보스는 이런 말을 한다. "너희는 이제부터 어른이다. 어른의 세계에서 이긴다는 건 노력이 아니라 방법을 안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아이들은 각기 다른 길을 선택한다. 도망치거나 저지르거나 방관하거나.
증오하면서 닮는다는 말은 정말 맞다. 방관한 아이는 무력한 아비가 되었고(임덕규) 도망치거나 빠져나간 아이는 돈과 지위가 전부인 세계를 그대로 내면화했고(손진호, 이상훈) 저지른 아이는 어른이 되지 못했다.(유일하게 결혼하지 않은 신재문) 그런데, 그들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그들은 자신들이 증오하면서도 무기력하게 받아들였던 세계와 정면 대결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제대로 된 어른이 될 기회, 자신들이 만들고 싶었던 세계에서 진짜 어른으로 우뚝 설 기회를 말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선 유난히 대결하듯 선 두 사람이라는 구도가 참 많이 나온다. 임덕규가 마치 청소년기의 자신을 마주한 것처럼 동네 건달소년들과 마주 서 있는 장면, 상훈과 언론사 국장이 마주 앉은 장면, 역시 상훈이 자신의 경호원들과 싸워보라는 진호에게 맞서는 장면, 처음 범죄의 세계로 자신을 이끌었던 조직 두목과 재문이 마주 앉은 장면.
소년들에게 좌절을 안겨준 어른들의 세계에 맞서 싸워 이겨야만 비로소 이들은 외상을 극복하고 어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쉬울 리가!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에 하나는 임덕규가 승부 조작의 댓가로 2억을 받아들고 나오던 장면이다. 긴 화면이 반으로 갈라져 있다. 왼쪽엔 주황색 불빛이 보기만 해도 따뜻하고 편안해보이는 유리창 안의 세계가 있고, 오른쪽 편엔 비까지 주룩주룩 내리고 있어서 춥고 어두워 고생스러울 게 뻔한 세계가 있다. 조직의 두목과 비신사적인 경기를 일삼던 거북이는 창 너머에서 이미 승리에 도취되어 있고, 불안과 갈등의 기미를 얼굴에서 떨치지 못한 신재문과 임덕규는 차디찬 비가 쏟아지는 바깥에 서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빗속으로 임덕규가 걸어나온다. 어쩌면 제대로 된 어른이 되기 위해서 이들은 외롭고 추운 길을 걸어야 하고,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이걸 견딜 자신이 없어서 그 길을 쉽게 포기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견디고 이기기로 한다. 맞서보기로 한다. 빗길을 걸어나오던 임덕규가 그 상징이다.
이들이 제대로 어른이 된다면, 그 아랫 세대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은 모두 이 대결에서 승리하고 진짜 어른이 된다. 덕규와 상훈과 재문은 자신이 패배했던 세계와 링 위에서 맞대결한다. 그들이 진짜 세계라고 생각했던 그 세계를 사각의 링 위에 구현한다. 그 세계는 바로 방법이 아니라 노력이 평가 받고, 술수가 아니라 공정한 룰이 지배하고, 정의롭진 않아도 적어도 불의가 상식은 아닌 세계다. 임덕규가 처음 필요에 의해 링 위에 섰을 때, 아직 그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쉽게 힘에 도취된다. 어린 시절 그가 그랬듯이. 하지만 맨 마지막 대결에서 상대를 기다려주는 것은 세상의 공정한, 합리적인 규율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피가 터지고 쓰러지면서도 끝내 무릎 꿇지 않는 아버지를 바라보던 수빈에게 상훈이 말한다. "너희 아빠 멋지지?" 그랬다. 우리에게 필요했던 건, 돈 많고 지위 높고 힘 센 어른이 아니라 '멋진 어른'이었다. 챔피언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멋진 어른이 있는 멋진 세계를 본 아이는 스스로 깨닫게 마련이다. 어린 수빈은 말한다. 학교에 돌아가 아이들과 맞서보겠노라고, 어떻게든 안 되겠냐고. 아빠가 사각의 링 위에서 그랬던 것처럼.
거친 세계를 보면서도 마음 한 켠이 따뜻해졌던 것은 네 소년들의 우정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 아이들이 완전히 망가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부모와 선생님 대신 친구들이 서로를 믿어주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파수꾼이 되어 호밀밭의 절벽 아래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었다. 이 아이들이 비정한 어른들의 세계를 만나기 전에 사랑을 안 것은 정말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사랑이 무슨 일까지 할 수 있을지, 우리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얼마전에 읽은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고 감동 받았는데, 이 구절의 구현이 바로 이들의 우정이리라. 사랑의 여러 가지 효용을 설명하다가 나온 구절.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랑을 할 때 우리가 가장 도덕적으로 된다는 것이다. 덕성의 핵심은 상대의 선을 원하는 것이다."("무엇을 더 알아야 하는가" 중에서) 친구들 삥을 뜯던 상훈을 지켜주었던 덕규, 철거민들을 위해 꼭 챔피언이 되야 한다고 덕규를 격려하던 상훈, 승부조작 제안을 받아들였음에도 그를 믿고 끝까지 돕는 재문. 승부 조작에서 끝내 발을 뺀 것도 어쩌면 상훈의 믿음, 그리고 상훈을 지켜주려던 덕규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빈이도 학교에 돌아가 꼭 그런 친구를 만나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너무 기능적으로만 쓰인 여성 PD 캐릭터도 거슬리고, 모든 인물들이 너무 평면적이지 않나, 생각해서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두 번째 보면서는 역시 강우석 감독은 상업영화의 달인이구나, 깨닫게 되었다. 인물들이 기능적이거나 평면적이라기보다 효율적이고 낭비가 없는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영화라면 그게 맞다. 인물들을 복잡하게 그리다 보면 캐릭터는 변덕스럽고, 스토리는 산으로 가게 마련이다. 주인공인 데다 내가 팬이니, 당연히 배우 황정민이 나올 때마다 눈에서 하트가 발사되긴 했지만 이 영화에서 새롭게 본 건 유준상이다. 예능이나 인터뷰에서 유쾌하고 파이팅이 강한 성격으로 나온 게 머릿속에 각인되어 그의 연기도 대충 그렇게 보였는데, 이 영화에서 뜻밖의 힘을 보여주어 깜짝 놀랐다. 이 영화로 난생 처음 배우들이 무대 인사 오는 시간에 맞춰 영화를 두 번이나 보러 갔다. 배우 황정민 덕에 정말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 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여러 가지로 해본다. 인생은 익사이팅하고 원더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