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우리 안의 늑대를 찾아서

양화 2013. 3. 1. 01:35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소개 받은 "철학자와 늑대"를 읽다. 지상의 모든 동물들을 소 닭 보듯 하며 사는 인간의 하나로써 늑대와의 삶을 통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한 번도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거나 다른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우리 안의 늑대, 진짜 우리를 발견하려고 노력해본적은 없는 것 같다. 헤아릴 수 없이 긴 시간과 복잡한 상호작용을 거쳐 우리는 지금의 영장류가 되었지만 우리 내부에는 여전히 늑대가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 늑대를 되살리는 것이 더 인간답고 품위있는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닐까 깨달음까지 얻었다. 주옥 같고 도끼 같은 구절들을 퍼둔다. 좀 길다.

 

저자가 키운 브레닌은 11년의 천수를 다한 후(늑대의 수명은 고작 7년 정도란다, 나도 이 사실을 처음 알고 깜짝 놀랐다), 수년 전에 죽었다.

사진 속의 큰 개는 그 브레닌의 딸 테스로 엄마는 개다. 아이는 늑대 브레닌이 죽은 후에 태어난 마크 롤랜즈의 큰 아들 브레닌. 브레닌은 웨일즈 말로 왕이라는 뜻이다. 

 

늑대를 키운 철학자 마크 롤랜즈는 영장류에게 산다는 건, 공격할 시점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영장류는 단 하나의 원칙에 따라 살아가는데, 그건 바로 '상대가 무엇을 해줄 수 있으며, 그 대가로 나는 어느 정도를 해주어야 하는가?'이다. 하지만 문제는 모든 인간들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 그래서 인간의 삶은 불가피하게 살벌한 '비용-편익 분석'의 수식 위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우리 내부에는 복잡한 진화 이전의 인간이 숨어 있는데, 모르긴 해도 우리는 우리 안의 늑대를 멸종시켜가고 있는 대가를 언젠가 치르게 될 거라고 걱정하고 있다. 책을 읽어가다 보면, 나도 그런 걱정에 동참하게 된다. 늑대를 길들이는 과정을 읽고 있노라면 늑대를 기르는 일이 아이를 기르는 일과 꽤 유사한 일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길들이는 과정을 육아에 접목시켜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늑대는 길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문제는 길들이는 방법. 사람들은 길들이는 과정이 기싸움이고 상대를 굴복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저자는 그 동물에게 다른 대안이 없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런 방법을 통해 저자는 무려 늑대를! 목줄도 없이 나란히 산책할 수 있게 길들였다.

 

저는 말한다. 왜 복종해야 하는가? 왜 개는 복종하는데 늑대는 복종하지 않는가. 그것은 그 두 동물이 살아온 세계, 적응해온 세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늑대가 사는 세계는 여전히 역학적 세계다. 그러므로 야생의 세계를 살아야만 하는 늑대는 목표와 수단을 추론하는데 더 유리하지만 사람에게 의존해 살아가도록 강요 당해온 개는 사람이라는 수단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도록 발전해온 것이다. 이것은 정신활동이 단지 머릿속에서 일어나거나 뇌의 프로세스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는 활동, 즉 환경을 조작, 변형하고 이용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미다. 러시아 심리학자 레브 비고츠키와 안톤 루리아는 "기억력과 그밖의 정신활동이 외부 정보 저장 장치와 함께 얼마나 변화했는지"의 연구를 통해 이같은 사실을 입증했다. 저자가 늑대를 훈련한 방법을 읽고 있노라면 이것은 육아의 원칙에도 적용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길지만 인용하겠다.

 

"어떤 사람들은 개를 훈련시키는 것, 특히 늑대를 훈련시키는 것은 동물의 본능을 모두 꺾어 가축처럼 만드는 잔인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나 늑대가 해야 할 일,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지를 알면 본능이 약화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감이 커져 더 침착해진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한때 말한 것처럼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대신 통제해줄 누군가를 빨리 찾아야 한다는 것은 엄연한 진실이다. 그리고 브레닌에게는 내가 그 역할을 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규율과 자유의 형태를 가능하게 한다. 규율 없이는 잠시 허가된 자유일 뿐,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59)

 

늑대를 훈련시키는 것은 늑대를 자연의 의도대로 살게 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잔인하다는 말 아래에는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객관화해서 반성할 수 있는 대자적 존재이지만 동물은 그렇지 못한 즉자적 존재라는 실존주의적 인식이 깔려 있다.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하면,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서지만 늑대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는 거다. 저자는 인간에 대해서는 존재의 유연성을 적용하면서 왜 다른 동물에게는 그같은 사정을 똑같이 적용하지 않느냐고 의문을 품는다. 모든 생물은 본능적인 욕구를 타고 난다. 하지만 그 본질은 역사와 운명의 우여곡절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물도 생물학적 꼭두각시가 아니며 "본질이 실존을 제한할 수는 있지만 고착시키거나 결정지을 수는 없다."(64) 모든 생물은 상황과 환경에 적응하면서 운명에 대처하고 조절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커지고 배우는 것을 즐기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 더 강해지고 더 행복해진다.

 

동물을 길들이는 과정에서 생기는 또 다른 갈등 하나. 반려동물이라 부르든 애완동물이라 부르든, 우리는 동물을 소유할 수 있는가 하는 거다. 소유하고 지배하는 불평등한 관계.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그렇게 정의하면서 길들이는 과정은 지배의 한 부분처럼 보인다는 거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도 관계, 라고 주장한다. 관계는 서로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와 서로의 일부가 되는 것. 그리하여 즐거워지는 것이라고. 그런 관계라면 늑대를 길들이려고 그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은 월권 아닌가. 그에 대해 저자는 철학에서 절대적 권리와 좀 성격이 다른, 적절한 상황에서는 양보할 수 있는 직견적 권리 개념으로 설명한다. 아이가 너무 어려 위험한 행동을 할 때, 그것을 제한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저자는 늑대 브레닌과 자신의 관계는 소유가 아니라 보호였으며, 형이 되기도 동생이 되기도 하며 서로의 일부가 되는 함께함이었다. 저자는 이것을 '기억'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새의 날개짓은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제공하는 것이지, 그 자체가 비행의 원리는 아니다. 원리는 날개 모양과 위아래로 가해지는 공기의 압력차에 있다... 일화 기억은 (이런 새의) 날개짓에 불과하며 항상 우리를 배신한다... 가장 좋았던 시간에는 특히나 신뢰성이 떨어지며 우리 뇌 기능이 약화되면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기억이다... 그러나 누구도 이름 불러준 적 없는 훨씬 심오하고 중요한 기억의 방식이 있다. 각자의 개성에, 그리고 그 개성이 발현된 삶 속에 깊이 새겨진 과거의 기억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러한 기억을 모른다. 보통 의식할 수 있는 종류의 기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기억들은 우리 자신을 형성한다. 우리가 내리는 결정, 취하는 행동, 그 결과 살아가는 삶 속에 드러난다. 우리 곁을 머물렀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않아도 우리의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우리의 의식은 변덕스럽고 기억이라는 임무를 행할 만한 자격이 없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들이 형성하도록 도와준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그들을 존경하는 방법이다."(71-72)

 

늑대와 함께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잠시라도 집에 혼자 두면 온 집안을 헤집어놓는다. 할 수 없이 강의실마다 데리고 다니는데, 학생 가방에서 도시락을 꺼내오기도 하지만 지루한 강의에 대해 항의하는 하울링으로 학생들에게 공감을 얻기도 한다. ^(^ 미식축구 연습장에 데려가면 다른 개들이랑 싸우려는 통에 성가시지만 선수들 파티장에서는 모든 여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만들어준다. 개가 좋아하는 공 주워오기를 가르치려다가 늑대의 이런 시선을 마주한다. '물어오라고요? 왜요? 필요하면 직접 가져올 것이지 왜 나더러 시켜요? 다시 가져오게 할 거면 애당초 던지기는 왜 던져요?'ㅎㅎ(81) 늑대의 놀이는 목을 물고 바닥에 몰아부친 후 넝마인형처럼 앞뒤로 사잡게 흔드는 것이다. 이런 싸움 본능은 이들에게 놀이 본능인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아침마다 얼굴을 핥거나 무릎에 올라와 쓰다듬어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강아지와 다를바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늑대가 문명화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에게 동의한다. 하지만 그건 늑대가 위험해서가 아니라 늑대가 거짓말을 하지 못해서다. 영장류의 문명화는 거짓말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것은 사물과의 관계를 파악하는 데 기반하는 늑대의 역학적 지능과는 다르다. 인간 뇌 크기의 증가는 앤드루 화이튼과 리처드 번이 말한 '마키아벨리적 지능 가설', 즉 (늑대의 세계인) 역학적 세계가 아니라 (영장류의 세계인) 사회적 관계의 요구에 기인한다. 그런데, 이 사회적 지능의 핵심은 속임수와 계략이다. 인간의 과학적 예술적 지능은 속임수와 계략의 가해자가 되고자 하는 진화의 부산물로 점점 향상된 것이다. 인간에게도 좋은 점이 있지 않을까. 이타심, 연민, 공감... 하지만 저자는 이런 감정은 동물에게도 공통적이란다. 이것은 다윈의 말처럼 모든 사회적 집단을 서로를 결속할 매개체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회성이 크다는 곤충들의 경우는 하나의 개체가 독립된 개체라기 보다 세포처럼 작용한다. 이것을 군체적 유기체(colony organism)라고 한다. 이들에겐 전체의 행복이 곧 자기의 행복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영장류의 사회적 정서는 이중성과 음모로 포장된 길을 따라 형성되었다. 동물과 달리 인간은 자신의 욕구가 무엇인지 안다. 가령 섹스의 쾌락은 늑대에게 번식 본능의 결과일 뿐이다. 원숭이 무리에서 알파 수컷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평생 교미 한 번 못해보고 죽는다. 하지만 인간은 쾌락을 위해 섹스한다. 또 하나, 인간이 발명한 것은 고의. 인간은 계략을 처벌할 때 너무나 가혹하다. 인간의 이성은 이렇게 고의적인 폭력과 쾌락 추구의 욕구 위에 세워진 구조물이다. 공격을 하려면 근거가 필요하고 근거에 증거만 있다면 폭력은 정당화된다. 근거, 증거, 정당성, 이 모든 것은 영장류의 사악함을 반증한다. "불만이 많을수록 더 사악해지고 화해에 무감할수록 정의는 더욱 필요해진다. 자연계에서 유일하게 영장류만이 도덕적 동물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불만으로 가득하다. 최고의 상태는 최악의 상태에서 나오는 법이다."(112)

 

그렇다면 악이란 무엇인가? 사실 이 부분이 나에게는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롭고도 새로웠다. 자연이 일으키는 재해로 인한 고통을 빼고 인간의 도덕적 악만 놓고 본다면 이것을 이해하는 한 키워드는 의도와 동기다. 콜린 맥긴은 이를 남의 고통이나 불행에 대해 갖는 쾌감인 샤덴프로이덴 개념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의 악은 의도나 동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이 설명을 위해 그는 두 예를 드는데, 하나는 인간의 무력감이라는 심리 연구를 위해 개를 학대하는 하버드대 실험과 지속적으로 친딸을 성폭행한 아버지와 이를 방치한 어머니의 예를 든다. 이 둘에게서 동기나 의도 부분에서 악을 찾아낼 수 있는가. 이 둘은 단지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뿐인데, 이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희생자, 절대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의무인 도덕적 의무, 다른 하나는 가능한 모든 증거에 따라 검증하고 최소한 반대되는 증거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노력할 인식적 의무다.

 

칸트는 해야 한다는 말은 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간파한 바 있다. 능력이 아닌 의지의 부재로 도덕적, 인식적 의무를 소홀히 할 때 악이 생겨난다. 이것이 악의 본질이다. 여기에 악의 또 다른 구성요소는 바로 희생자의 무력함이다. "진정한 인간의 선은 아무런 힘이 엇는 이들을 대할 때 발현되는 듯이 약함, 최소한 상대적인 약함도 인간 악의 필요조건이다. 그리고 인간의 근본적인 직무유기가 나타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다른 존재의 나약함을 조작하는 동물이다... (인간의 삶이란) 강자로부터 약자를 솎아내는 매우 불편한 과정이다. 삶은 이처럼 본질적으로 냉혹하다."(141-142) 우주의 생성에도 이러한 삶의 특징은 반영되어 있다. "최초에는 단순한 단순한 유기체 분자가 그 액체의 자유원자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게 되었다. 한 분자의 정교화는 다른 분자의 정체나 소멸의 결과일 수밖에 없었다. 삶은 태초부터 제로섬 게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영장류의 속임수와 계략은 대부분 자신보다 강한 영장류를 자신보다 약하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다. 인간은 언제든 악을 행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저자는 묻는다. 과연 인간은 다른 종에 비해 가치 있는 존재인가, 혹은 우월한가? 저자는 늑대의 달리기에서 보듯 지구 상에 존재하는 생물 종들은 모두 각각 필요한 형태로 진화했고, 그 형태마다 우월하거나 효용이 큰 기술이 다르다. 그러므로 우월성은 필연적으로 대상이 되는 생명체와의 연관 속에서 판가름난다. 절대적 우월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이성의 산물로 자랑스러워하는 문명도 그렇다. 홉스는 인간이 사회계약을 통해 문명화되었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야만의 상태에서 문명의 상태로 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야만의 상태에서 계약을 시도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저자는 브레닌과 사회계약을 맺지 못했다. 이 사회계약이란 것은 인간의 특성을 기반으로 한 전제들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 전제는 권력에 대한 집착, 인간은 자신보다 취약한 존재에 대해 도덕적 의무를 지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회계약은 본질적으로 상호호혜에 따라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을 돕거나 해치지 않는 방법으로 상대로 그렇게 하기로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전제는 계약은 기대 이득을 위한 의도적 희생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은 기대를 위해 희생을 감수한다고 하지만 잘 들여다 보면, 그런 체해서 상대방이 믿기만 하면 된다. 이런 특성상 계약은 사기꾼에게 유리하다. 이 때문에 롤스는 정의론에서 자신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사회를 조직하도록 시켜서 공정한 사회를 구성한다는 상상의 장치를 주장했다. 바로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이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인간이 이성적 존재임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저자는 이 계약이 진정으로 공정해지려면 인간이라는 사실과 이성조차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자신이 만약 원초적 입장이 된다면 동물이 식용으로 사육되지 않는 세상을 택하겠다고 하고, 이것은 동물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는 무려 늑대에게 채식을 강요한다!! 물론 완전히는 아니고 참치와 치즈까지는 허용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이거 동물 키우는 게 육아란 비슷한데.. 라고 생각했다. 부모가 택한 원초적 입장을 아이도 따라야 한다는 측면에서.^^

 

하지만 어떤 사람에게 이것은 늑대의 타고난 천성을 거스르게 하므로 비도덕적이라는 주장할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도덕에는 불편이 따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불편은 그것을 선택한 사람 혹은 동물이 감수해야 하는 불편과 희생자(이 경우 소)가 되어야 할 대상의 결정적 편의 사이의 균형 위에서 찾아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선택한 삶의 방식의 도덕성이고, 이러한 결정에 힘의 불균형이 최소한의 영향만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 계약은 힘과 속임수의 문제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계약의 본질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타인과 무리에 대한 도덕성이 필요한데, 이것은 기존의 주장이 말하는 정의가 아니라 신의를 전제로 해야 한다. 진정한 관계는 계약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에 의해 맺어질 수 있다. 그런데, 둘 사이에 맺어지는 신의는 때로는 다른 사람에 대한 정의를 앞서기도 한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고백한다. 인간을 피해 철학자가 되었노라고.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실존과 결별하는 것이며, 이론과 추상적 개념의 황량하고 얼음에 뒤덮인 산꼭대기를 거침없이 등정하는 의지이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은 묻는다.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한가요?" 그는 수많은 철학자가 행복에 너무 집착한다고 꼬집었다. 하지만 행복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행복할 때를 조사하면 행복이나 불행의 실체는 특정한 감정이다. 행복의 범주에 포함시키려는 감정이 다양해질수록 인간은 세련되어지고, 인간은 "영원토록 부질없이 감정을 추구하는 존재"다!(208) 그렇다면, 늑대는? 늑대는 토끼를 쫓는다. 하지만 성공하기보다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 사냥 과정이라는 걸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것은 "가장 원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억제해야 하는 것"(214)이다. 긴장의 고통, 정신과 신체의 의도적인 경직, 공격하고 싶은 열망과 그렇게 하면 실패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갈등, 만약 이것이 행복이라면 그것은 황홀경이라기보다 고통일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롤랜즈가 봤을 때, 토끼의 목을 깨무는 순간이 아니라 그를 쫓는 과정에서 브레닌은 분명 행복을 느꼈다. 저자에게는 철학이 그랬다.

 

잡기에 벅찬 토끼를 쫓는 것처럼 쫓기에 벅찬 생각을 따라간다. 정말 열심히 노력하면 전에는 생각할 수 없던 것을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괴로운 일이다. 괴롭지만 계속 자극하지 않으면 생각은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 생각하지 못한 생각을 떠올리면 성취감을 느끼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것은 행복 자체가 필요조건으로써 불편함을 끌어안고 있는 것이다. 그는 권투를 하던 당시를 기억을 통해서도 비슷한 생각을 확인한다. 신나게 얻어터지고 난 후, 공이 울릴 때 공포가 찾아왔지만 그것은 평온하고 긍정적인 두려움이었고 놀라울 만큼 침착해지면서 기쁨이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잘하는 것을 할 때, 그리고 동시에 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 때 생겨났다. 이 기쁨은 말하자면 앎의 기쁨에 가까운 것이다... (링 위에 있는 순간 그는) 집중력의 비눗방울 안에서, 그리고 신체적 감정적 능력의 한계에서, 다른 방식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218-219)던 것이다. 가장 본능적이어서 가장 활기찬 삶의 한 순간, 두려움과 기쁨을 분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신정론, 혹은 변신론은 삶에서 느끼는 불행의 원천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이것은 삶은 목표나 목적이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삶이 어떤 의미와 목적을 지녔다면 공포나 아픔, 고통은 어디쯤 있는가를 탐구한다. 그렇다면 삶은 무의미하다고 정의하면 간단한가? 아니다. "진짜 어려운 것은, 의미를 추구할 때 왜 우리의 삶은 진정 중요한 것에서 멀어지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저자는) 으레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삶의 의미란 허상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기에 아픔이나 고통도 삶의 의미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삶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삶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 때문에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 속에서 감정이 아니라 토끼를 쫓아야 한다. 우리 삶에서 가장 좋은 순간, 우리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은 순간은 즐거운 동시에 몹시 즐겁지 않다. 행복은 감정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감정에 초점을 맞추면 요점을 놓칠 것이다.(220-221)

 

내가 반려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나보다 먼저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랑을 주었던 대상을 잃는 일을 자청해 겪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롤랜즈 역시 피할 수 없는 그 시기를 맞는다. 병에 걸린 브레닌을 돌보기 위해 그는 불가피하게 브레닌에게 고통을 가해야만 했다. 두려움은 두 시간마다 치료를 한다는 명목으로 브레닌에게 고통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고통의 핵심은 브레닌의 외로움이었다. 브레닌이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면 어떻게 하나 가장 두려웠지만 만약 브레닌이 살아나기만 한다면 녀석이 평생 나를 싫어해도 괜찮아, 라고 생각한다. 자기를 사랑해줘야 하는 사람이 자기를 며칠이고 고문했다고 느낄지 모른다는 생각, 늘 함께 놀았던 테스와 친구 니나는 뭔가 달라진 브레닌이 다가가기만 하면 자리를 피했던 그 가슴 아픈 느낌을 롤랜즈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저자는 자신이 도덕적 문제에 있어서 결과주의자며 의도란 무언가를 가리는 가면이므로 의도로 포장하지 않고, 비슷한 상황에서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해주겠다고 결심한다.

 

"나라면 단지 '목숨만이라도 부지해야 한다'며 나를 살려두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회복해서 충실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면 나는 누군가가 나를 위해 싸워주기를 원할 것이다. 비록 내가 그 행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도 말이다."(244) 그래서 자신은 싸운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그저 브레닌이 없는 삶을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변명이었음을 깨달았다. 사실 이 대목을 읽으며 최근에 보았던 '아무르'를 떠올렸다. 병들어 더 이상 인간으로써의 존엄을 유지할 수 없었던 아내는 침대에 누워 남편이 주는 식사를 거부한다. 아내에게 죽 한 숟갈을 먹이기 위해 안달하던 남편은 아내를 얼굴을 때린다. 절대 가치라는 '생명'이 갖고 있는 폭력성이 끔찍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 권력이 되지 않는 보살핌이란 없는 법이다. 결국, 저자는 자신의 결과주의적 영혼의 외침으로 겨우 정신을 차린 저자는 브레닌의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한다.

 

"사람들은 사랑이 따뜻하고 나른한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곪아서 냄새가 나고 감염으로 엉망이 된 엉덩이를 한 달 넘게 씻겨보면 사랑이 그렇게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248) 혼돈 상태, 그중 어느 것도 사랑이라고 부를 만큼 지속적이지도 분명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브레닌이 곧 죽을 거라는 확신이 들자 안도감이 들었다. 약을 주사할 시간이 되면 브레닌이 다시 일어서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사실이다."(248) 멍하고 메스꺼우면서 곧 죽을 거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드는 이 이질적이고도 다양하고 분열된 감정, 이 모든 것이 필리아다. "하지만 감정이 곧 사랑은 아니다. 필리아는 상황에 따라 너무나 다양한 감정이 동반되기 때문에, 그 어느 일면에 동일시 될 수 없다. 더 나아가 필리아는 그러한 감정들 없이도 존재할 수 없다. ... 사랑한다면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 한다. 본질적으로 필리아는 우리가 인정하고 싶어하는 것보다 훨씬 가혹하고 잔인하기에."(249) 울컥한 감정으로 이 대목을 읽는다.

 

결국 롤랜즈는 안락사를 결심한다. 브레닌이 죽은 후 신을 원망하던 롤랜즈는 문득 브레닌이 죽음으로 무엇을 잃었는지 생각한다. 왜 죽음은 나쁜가? 비트겐슈타인은 삶과 죽음은 삶의 한계라고 했고, 잃는 것이 있다면 생명이라고 했다. 에피쿠로스가 아무리 죽음은 우리를 해칠 수 없다고 했어도 말이다. 죽은 후에 인간은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은데, 죽음이 인간으로부터 무엇을 빼앗아갈까. 가장 설득력 있는 답은 '가능성'이다. 하지만 그 가능성에는 실현되기를 바라지 않는 가능성까지 포함되므로 난삽하다. 이것은 어떤가. 인간은 미래를 위해 너무 많은 투자를 한다. 그래서 죽음으로 미래를 잃게 되면 너무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이것은 '삶의 의미'에 과도한 집착 때문 아닐까? 우리가 생각하는 "삶의 의미는 우리의 욕망, 목표, 과제에 연관된 함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는 우리를 발전시키는, 우리가 성취해낼 수 있는 무엇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중요한 성취물들은 바로 이 시점이 아니라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달성되는 것들이다."(279) 하지만 생각해보라. 우리는 우리 삶의 끝을 알고 있다. 그것은 죽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래에 놓인 인생의 의미를 향해 흘러가고 있지만 그 끝은 죽음과 만난다. 그래서 이 선(線)적 시간은 "우리를 매혹시키기도 하고 공포에 떨게 하기도 한다. 이것이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고통이다."(280)

 

하지만 브레닌의 시간은 어떠했던가. 저자는 브레닌이 죽기까지 프랑스에서 보냈던 단조롭고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일상을 떠올린다. 사람이라면 지루해, 지겨워를 내뱉으며 진저리를 쳤을 그 반복적인 일상의 매순간마다 몰입하던 늑대 한 마리와 늑대개 한 마리와 개 한 마리의 시간. 그는 인간은 직선적 시간을 살지만 동물은 순환적 시간을 살기 때문에 동물에게는 그들이 누리는 시간이 "시간 속에 퍼져 있는 다른 어떤 순간들과도 섞이지 않은, 그런 순간이었다. 그 순간 전후에 일어날 일들이 더 추가되거나 덜어지지도 않은 완전한 순간"(283), 하지만 인간에게는 순간만으로 완전한 순간이란 없다. 모든 순간이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라는 불순물에 얼룩져 있다. 하지만 삶의 본질은 어쩌면 반복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도 그렇고, 삶과 우주가 한정된 수의 미립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만큼 이 미립자들의 조합과 재조합은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 무한 반복할 거라는 것이다. 시간이 만약 직선이라면 삶의 여정은 육체가 소멸된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삶이 전부라면?

 

지금 이 삶이 전부이고 삶이 영원히 원처럼 반복된다면? 인간이 순간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순간은 항상 흘러가버리기 때문에 삶의 의미는 순간에 있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 순간들의 의미는 일직선상의 어떤 시점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기억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과거의 일 또는 기대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미래의 일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그 어떤 순간도 그 순간만으로는 완전하지 못하다. 모든 순간의 내용과 의미는 유예되어 있으며, 시간의 화살이라는 길고 긴 직선 위에 분호되어 있다."(289) 하지만 원이라면 순간은 흘러가버리지 않고 끊임없이 재현된다. 과거의 얼룩도 미래의 유령도 없이 모든 순간은 그 자체로 완전해진다. 이런 생각을 통해 롤랜즈의 브레닌의 상실을 극복한다. 순간을 통과해서 보는 인간의 눈을 버리면 시간의 상처도 대수롭지 않다. 인간의 삶에 대한 오랜 신화의 비유, 시지프스 신화. 시지프스에게 내려진 것이 형벌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무런 목표없는 그의 노동의 허무함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삶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목적일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만약에 삶에서 중요한 것이 어떤 목표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목적이 이루어지자마자 더 이상 삶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삶에서 중요한 것은 노력해 나갈 수 있는 대상이고, 삶은 목표와 계획 간의 함수 관계이다. 하지만 시지프스를 생각해봐도, 삶의 의미가 그것이 최종 단계나 목표를 향해 가는 일일 수는 없다. 그저, 우리 모두의 삶은 시지프스가 언덕 꼭대기로 향하는 여정과 같으며, 하루하루는 시지프스의 한 발자국과 같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작은 목표와 사소한 목적으로 채울 수 있다. 이건 삶의 의미와는 다르다. 이런 사소한 목적은 우리나 우리 후손들에게 그저 무한히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삶의 의미가 목적이라면 우리는 그 목적을 절대로 달성하면 안된다. 삶의 의미가 목적이라면 계속 의미를 갖고자 하는 삶의 필요조건은 그 목적을 달성하지 않는 데 있다. 내가 이해라기로 이것은 삶의 의미를 하나의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316)

 

우리는 무엇을 소유할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욕망, 목표, 과제의 화살이 스쳐갈 수 있는 만큼"(317)이다. 하지만 영장류는 정말 중요한 것을 소유할 수 없다. 바로 순간. 살면서 만나는 몇몇 순간들, 이 특정한 순간의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이 순간들이 바로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다."(320) 우리는 최고의 순간에 대해 세 가지 오해를 갖고 있다. 첫째, 최고의 순간은 삶에서 이룩해야 하는 순간이다. 둘째, 최고의 순간에 강렬한 환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아니다, 매우 끔찍한 순간일 수도 있다) 셋째, 최고의 순간에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존재하는 것은 진정한 자아가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이다. "중요한 것은 내 모든 최고의 순간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완전하며, 나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인지 정의하려 그 존재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순간이지, 그 순간에 드러나는 (그것도 잘못 해석된) 특정한 존재가 아니다."(322)

 

브레닌이 죽음과 타협하지 않았을 때, 바로 그때가 저자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이것이 바로 시지프스의 궁극적 이해다. "우리는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이 의미가 없고 희망도 없을 때 비로소 우리의 최상에 도달한다.... 최상의 상태가 되려면 먼저, 희망도 없고 더 이상 계속해도 얻을 게 없는 궁지 속으로 내몰려야 한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나아갈 수밖에 없다."(323-324) 이 순간들은 그 자체로 의미있다. 그 순간에 실재하는 내 모습만큼은 시간이 결코 앗아갈 수 없으므로. 시간의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시작하는 시점과 끝나는 시점이 아니라 마치 수확기의 흩어진 보리 낱알처럼 삶의 전반에 걸쳐 흩어져 있는 그 최고의 순간들만이 의미가 있다. 브레닌을 기억하면서 그는 우리 자신이 우리를 기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되새긴다. "우리의 가장 아름답고 가장 두려운 순간들은 좋은 것이든, 악한 것이든 타인에 대한 기억을 통해서만 우리의 것이 된다. 나의 순간은 무리의 순간이며 나는 무리를 통해서만 나 자신을 기억할 수 있다."(334) 최상의 상태의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 그것만을 염두에 두라.

 

마음 깊은 곳에 차가운 감동이 스미는 한 구절.

 

"브레닌을 묻던 밤, 랑그도크 지방의 살을 에는 추위와 장례식용 모닥불에서 번지던 밝은 빛의 온기. 그 안에서 인간 조건의 근원을 찾아본다. 선택이 가능하다면 누구나 희망을 주는 따스하고 너그러운 삶을 택할 것이다. 다른 편을 택한다는 것은 미친 짓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당도한다면 늑대의 냉정함으로 살아 나가야 한다. 힘들고, 차갑고,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는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바로 이 순간들이 삶을 가치있게 만든다.  결국 우리의 담대한 도전만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이다. 만약 늑대에게 종교가 있다면, 바로 이런 교리를 들려줄 것이다."(330)

 

굿바이, 브레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