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삶을 모른다
"달팽이 안단테"는 읽은지 한참 된 책(4월에 읽은 책이네.. 켁!)이라 가물가물하지만 올해를 넘기지 않고 임시 저장해둔 책 관련 글들을 정리하리라 마음 먹은 김에 마무리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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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창문을 통해서 이웃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들 또한 내게는 친근한 시골풍경의 한 부분이었다. 그들은 일은 하러, 혹은 심부름 때문에 집을 나섰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기도 하고 장작을 패기도 하고 길가에 세워진 우편함을 열어보기도 했다. 황혼이 깊어지면 들판 위로 쏙독새 한 마리가 낮게 날아가는 모습이 시야에 잡히곤 했다. 어둠은 짝을 찾아 헤매는 반딧불이들이 여기저기서 은밀한 불꽃을 반짝이게 했다. 밤이 더 깊어지자 어느 틈에 재빠르게 움직이는 박쥐들의 형상은 심야의 먹잇감을 향해 쏜살같이 내리 덮쳤다. 그리고 부엉부엉 숲속에서 들려오는 올빼미의 울음소리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부드러워지더니 태곳적부터 먼 외계에서 날아온 별빛을 받으며 서서히 모양을 바꾸는 달 아래서 마침내 모든 것이 고즈넉해졌다. p. 167-168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지음, '달팽이 안단테' 중에서
아무것도 없는 그저 풍경 묘사일 뿐인데, 아름답고 충만하다. 어쩌면 삶도 이런 것인지 모르겠다.
아침 와이드 뉴스 프로그램 - 정치, 사회, 경제 등으로 분류되는 상식적인 뉴스뿐만 아니라 맛집 탐방, 우리 이웃집 얘기를 들려주고, 심지어 고도비만자 살 빼주는 일까지 도맡아하는 오지랖 넓은 아침 프로그램들 말이다 - 을 보다 보면 자주 나오는 게 '건강'에 관한 거다. 건강 관리는 이데올로기나 입장이 필요없는 만인의 관심사이니 가장 다루기 손쉬운 주제이기 때문이겠지. 몸에 좋다는 먹거리, 지역 특산품, 건강 운동법 같은 정보가 주로 나오지만 빠지지 않는 아이템 중 하나가 중병에 걸렸는데, 산에 들어가서 맑은 공기 마시며 좋은 먹을거리 먹었더니 아주 건강해졌다는 얘기다. 그런 이야기들을 보면서, 삶이 삶 자체로 의미있다는 것에 머리로는 동의하지만 그냥 목숨을 부지하고 산다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게 또 사는 거라고 할 수 있나... 하는 마음의 반발이 조용히 인다. 암 말기 선고를 받고 그 길로 산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살면서 산속을 운동 삼아 걷거나 섭생에 신경 쓰며 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가족과도 떨어져 지내는 초로의 남자 이야기를 몇 주 전에 보면서 계속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당장 삶이냐 죽음이냐에 순간을 맞닥뜨린다면, 우리는 유전자의 명령대로 살아남기 위해 내가 가진 자원을 총동원해야겠지만 그래서 살아남았다면, 그 다음은?
저자가 서른 네 살에 떠난 짧은 유럽 여행에서 심각한 신경장애 증산을 유발하는 미확인 바이러스성 또는 세균성 병원체에 감염된 후 전신마비 증상으로 자리에 누워 20여 년을 보내는 동안 우연히 달팽이를 만나고 그것과 함께 지낸 이야기를 담아낸 이 책은 그런 물음을 내게 지속적으로 던진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건강은 우리 삶에 의미와 목적을 불어넣지만 질병은 놀랍게도 그러한 확실성을 순식간에 앗아가 버린다"(20)고. 생존이 목적이 되는 순간, 삶에서 의미있었던 모든 나머지 것들은 모두 사치가 되고 만다. 건강할 때는 중요했던 것들이 일시에 하찮은 것이 되어버리는 순간, 모든 확실성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는 순간.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것이 행복이라면, 행복이 때로 무의미한 것, 불필요해보이는 것들에서 비롯되는 거라면, 과연 생존과 행복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을까. 저자는 누워서 생각한다.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 삶을 지탱시켜주는 야생의 숲, 그리고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사회적 관계들이 모두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29)고. 그러면서 곧이어 "생존은 특정한 목표, 관계, 믿음, 또는 가능성의 언저리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희망 같은 것에 의존한다"(29)고 이야기한다. 존재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삶의 최저점을 통과하고 나면, 생존이 곧 행복이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걸까.
살뜰한 보살핌을 받고 있지만 그는 이야기도 할 수 없고 걸어다닐 수도 없다. 침대에 고립된다. 그러면서 그는 말한다. "고립은 사람을 더욱더 깊이 병들게 한다. 그때 유일하게 존재를 규정하는 법칙은 불확실성밖에 없으며 그 속에서 유일한 움직임은 시간의 흐름뿐이다.... 질병은 사람을 고립시킨다. 고립된 사람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다. 보이지 않게 되면 자연스럽게 잊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달팽이...... 우리 달팽이는 내 영혼이 증발하는 것을 막아주었다."(151-152) 관계만이 영혼이 증발되는 것을 막아준다. 하지만 그 관계가 그렇게 단단한 것이 아니어도 상관없으리라. 최저점을 통과해본 사람은 아는 걸까. 그이는 생존이 "특정한 목표, 관계, 믿음, 또는 가능성의 언저리에서 균형을 잡고 있는 희망 같은 것에 의존한다"고 말한 후에 "그것들보다 더욱 덧없는 어떤 것, 어쩌면 뚫고 지나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단단한 유리창을 통과해서 담요를 따뜻하게 덥히는 햇살,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두터운 담벼락 너머로 커다랗게 들리는 바람소리 같은 것 덕분에 우리의 생명이 유지되는지도 모를 일"(30)이라고 말한다. 더 적은 것을 가지고도, 의미 따위는 없어도 살아있는 것만으로 행복을 성취하는 수준에 도달하게 되는 걸까.
매일매일 더 많이 갖고 싶은 욕망, 더 윤택해지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이런 욕망들은 뭘 먹는지 점점 더 커진다. 달팽이를 살피면서 저자는 생명 자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경지에 도달한다. 자신을 고립 안에 가둔 병원균이 실은 지금 내 생명의 구성요소였다는 것. "종의 진화는 부분적으로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병원체의 독특한 역사를 통해 이루어졌다. ... 유전자 암호에 아직도 다른 동물들의 형질이 남아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107) 또한, "병 때문에 언제나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그동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이 나 자신의 생존이나 내가 속한 종의 생존 문제가 아니라 생명 자체가 진화를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임을 깨달았다."(190)고 말한다. 이건 경지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수준일 게다. 거대한 우주에서 나로, 나에게서 작은 병원균 하나로, 다시 병원균에서 나로, 나에서 다시 우주로 존재의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사유를 통과하지 않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삶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