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식탁 위의 책들이 있는 어린 시절의 서가
"산다는 건 단순히 목숨을 이어가는 게 아니다. 만약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면, 효율성이나 합리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의미하고 사치스러운 것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 사실을 외면할 때 수프는 더 이상 위로가 될 수 없다. 톰슨 역시 한때 수프의 온기에 의지해 사는 빈민이었다. 백작이 된 후에는 그 기억을 잊은 걸까, 아니면 잊어버린 척 하는 걸까?" p. 194 정은지 지음 "내 식탁 위의 책들" 중에서
이런 책이 좋은 건지, 이런 저자가 좋은 건지, 아니 둘 다 좋은 건가? 몇 년을 애써 쌓아온 경력을 미련 한 톨 없다는 듯 휙 내던지고 다른 길로 타박타박 가서는 재밌고, 즐겁게 살고 있는 사람. 그 분야에서 또 십 몇 년을 지내놓고 어느 날 제 관심사를 좇아 어디론가 날아가버릴 것 같은 사람. 남들은 수 년 동안 애를 쓰며 이뤄냈을 일을 척척 쉽게도 해내는 사람. 그런 사람 말이다. 뭘 이루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는 사람보다 힘 하나 안 들인 것 같은데, 어느새 뭔가를 척척 잘 해내고 있고, 아, 그게 천부적 재질인가, 하는 순간 또 쉽게 길을 바꾸는 사람. 바꾼 길에서도 마치 원래 그 길이 자기 길이었던 듯 척척 해내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나 같은 보통 사람을 쉽게 체념하게 만들기 때문에 좋은지 모른다. 너무 애쓰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넌 뭐야?, 하면 되잖아?, 니가 안되는 건 순전히 니 탓이야!, 하는 거 같아 멀리하고 싶다. 아, 이런 건 이런 사람이나 하는 거지... 싶은 사람에게는 질투도, 부러움도 일지 않는 법이다.
"내 식탁 위의 책들"의 저자 정은지가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예고에서 성악을 전공하다가 어느날 노래를 때려치우고 서울대 국제경제학과에 입학한 후, 박사 과정까지 수료하고는 지금은 번역 및 글을 쓰고 있는 그 이가 보기만 해도 갖고 싶은 책을 펴냈다. 제목 그대로 식탁 위에서 읽은 책들이자 책 속에 펼쳐진 식탁에 관한 이야기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말한다.
"어릴 때부터 나는 먹는 이야기에 집착했다. 주인공이야 왕위를 빼앗기건 해적에게 납치당하건 배가 난파해 무인도에 떠내려가건 내버려두고, 그들이 뇌조를 굽거나 알뿌리를 캐는 장면에나 심취했다. 오랫동안 굶주리다 간신히 발견한 굴 껍질에 칼을 밀어 넣고 억지로 비튼다. 입을 바싹 대고 욕심 사납게 빨아들인다. 턱으로 흘러내리는 비릿한 냄새를 나는 맡을 수 있었다. "죽음의 무도"에서 스티븐 킹은 말했다. 자신이 호러에 탐닉하는 것은 상상력 때문이라고. 내가 먹는 장면만, 오직 먹는 장면만 보고 또 본 이유는 그거였다. 그림이 아니라 글이기에 그 힘은 오히려 강했다. 단호히 말하지만 세상에 아직 못 먹은 음식보다 맛있는 음식은 없다. 나는 상상하고, 상상하고, 상상했다." p. 7
나 역시 그렇다. 책에 묘사된 음식은 선천적 미맹이자 먹는 데 흥미가 없는 나조차 입맛 다시게 만든다. 듣도 보도 못한 음식 재료와 향신료와 조리법으로 종이 위에 만찬이 차려지면 세상에 그것보다 맛있을 거 같은 음식이 없어 보인다. 설사 그 음식 재료가 현실에서라면 내가 입에도 안 대는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나와 저자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혼자 살면서도 신선한 음식재료를 사서 정성껏 요리해서 하나씩 둘씩 사모은 예쁜 그릇에 담아 매 끼니를 차리고 먹지만(그이의 블로그를 구경하면 입이 딱 벌어진다) 나의 행복한 만찬은 종이 위에서 그치고 만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책이 나를 끄는 것은 이국적인 온갖 요리의 향연이 아니다. 그 책들이 꽂힌 어린 시절의 서가다. 소공녀, 작은 아씨들, 키다리 아저씨, 빨간 머리 앤, 창가의 토토, 집 없는 소년 등등, 몇몇 책을 제외하고 그가 호출한 책들은 대개 어린 시절의 책들이다. 어떤 사람의 어린 시절 서가를 기웃거리는 일은 내게 늘 막연한 서러움과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또래의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우리 어린 시절에는 책이 귀했다. 정규 학교 과정조차 제대로 밟지 못했던 부모 세대는 교과서 이외의 책을 알지 못했다. 책은커녕 활자가 찍힌 종이쪼가리조차 드물었으니 내가 접한 책이라곤 부유했던 친척집의 세계명작동화전집(제대로 된 번역본도 아니었을 게 뻔한)과 초등학교 6학년을 다녔던 시골 초등학교의 도서관 책들(어떤 선정기준이 있었을까?)이 전부였다. 그 도서관의 서가인들 온전했을까. 오빠가 학교에 찾아온 외판원에게 산 세로 조판의 한국문학전집(아마 가로 조판으로 바뀌면서 기존 판을 떨이하려던 것이었으리라)을 빼고 그럴 듯한 독서라는 걸 하게 된 건, 대학생이나 되어서였다. 학교 도서관의 책들을 매주 3권씩 꽉꽉 채워 빌려 읽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어린 시절에 마땅히 읽었어야 할 책들의 목록에 대해 한탄했다. 어쩌면 그 한탄이 끝없는 책 욕심으로 변한 건지도 모르겠다. 내 아이들에게는 풍성한 서가를 물려주겠노라는 허영기 다분한 욕망에서 나온.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의 서가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
책 속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가 현대인들의 소외와 고립, 맵고 짜고 시고 달고 쓴 인생의 맛, 시대와 지형의 영양학, 비인간적 가축 사육 등과 맞닿을 때마다 나는 저자의 손끝과 가슴에 밴 교양과 균형감과 무심함은 틀림없이 어린 시절 꽉 차 있던 서가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책에 나온 책이야기, 책에 나온 사물들에 관한 모든 이야기에 내가 매혹되었던 것은 그들이 가진 서가를 염탐하는 자의 관음증이었던가 보다. 그 가운데서도 어린 시절의 서가가 짱이다! 물론 이 책은 무척 재밌다. 요크셔 푸딩의 요건을 정해주거나 (로스트비프를 구울 때 떨어진 동물성 기름이 정체인 요크셔 푸딩은 높이가 4인치는 되어야 요크셔푸딩이라 불릴 자격이 있단다) 완벽한 홍차 끓이는 법 등을 발표하는 영국의 왕립화학학회의 오지랖에 놀라고, 유럽연합에서 피자를 굽는 오븐 온도를 250도로 정할 때 이탈리아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그 뿐인가. 호첸프로츠에게 먹인 독버섯의 종류가 무엇인지 찾기 위해 독일 블로그를 뒤지고,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저자가 번역본에 언급된 일본 요리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번역본과 영역본과 일본어원본을 삼중대조하고, "작은 아씨들"에 나온 라임피클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맞댄 전세계 "작은 아씨들" 애호가들의 노력 덕에 이야기는 더 풍성하다.
이런 노력을 해주는 이들 덕에 나 같은 사람의 한나절이 즐겁고 풍요로웠다. 책의 만듦새도 훌륭하다. 실사도 아니고, 실사에 가까운 세밀화도 아니고, 디자인에 가까운 그림체로 그려진 삽화가 책의 문체와 내용에 아주 잘 어울렸고, 삽화를 활용해 다섯 장이나 만들어준 책갈피에도 감사. 그림이 예쁘고 모양과 크기가 마음에 들어 코팅을 할까 했는데, 그러면 잃어버리면 안돼, 하는 강박이 생겨 마음 편히 쓸 수 없을 거 같아서 그냥 썼다. 분실이나 구겨짐, 더러워짐에 대한 걱정없이 마음 편히 이 책 저 책에 끼워두고 쓸 수 있다는 게 장점. 한 편 한 편이 너무 짧아 아쉽다는 생각이 들곤 했지만 더 길었어도 지루했으리라. 쉽게 읽히지만 결코 쉽게 쓰여지지 않았을 - 단순히 노고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소재에 대한 애정의 점도(정도의 오타가 아니다)는 자료 조사 같은 노가다로 성취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 이런 책이 많아졌으면. 지적이면서도 잰 체 하지 않는 무심함은 암만 부러워해도 끝내 내 것이 될 수 없을 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