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닉 혼비의 노래(들)

양화 2012. 4. 26. 09:58

닉 혼비의 소설들을 읽지 않았다. 그가 쓴 소설이 원작이라는 영화도 보지 않았다. 그에 대해 아는 건 그저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풍문뿐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취향을 내가 동경하는 것 같다는 희미한 느낌이다. 그래서 내가 도전한 건, 닉 혼비의 에세이들.. 닉 혼비가 영국 신문에 연재했던 책 칼럼집을 먼저 읽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글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심드렁함, 퉁명스러움은 동경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언정, 호감의 대상이 되기는 힘들다는 사실만 깨닫는다. 거기 소개된 책들이 모두 내게 친숙하지 않은 책들이어서도 그랬겠지만... 두 번째 시도는 '음악에세이'다. "닉 혼비의 노래(들)" 닉 혼비는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에 대한 에세이를 쓰면서도 특정한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드러내기 보다 유형화된 사람으로서의 자신만 드러낼 수 있는 멋쟁이지만 유혹당하는 데는 이번에도 실패했다.(그토록 원했건만!) 하지만 이 부분만큼은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 말이 있어야 뒷말 이해가 쉬울 거 같아 인용이 좀 길어졌다.

 

요즘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읽고 마음에 들면 사는 패턴인데... 다 읽은 책을 새로 사자니... 뭔가 손해보는 느낌. 이 책은 다 읽었으나 사지 않은 책.

 

 

 

그렇다면 노래에 적절한 소재란 무엇일까? 노래는 많은 면에서 책과 다르다. 그러나 작사작곡가와 소설가가 바라는 소재는 같다. 그 소재 자체를 넘어서는 무엇, 반향과 아이러니와 조화와 미묘함을 갖춘 무엇, 시대에 맞으면서도 시대를 뛰어넘는 무엇, 팝뮤직의 경우에는 7백번 이상 계속 플레이되고 가능하다면 마가린 광고 두 편 정도에 쓰일 수 있는 무엇을 어떻게든 표현할 수 있는 소재다. 그 노래가 자체가 어떻든, 판단력보다는 운의 힘으로 팬과 라디오방송국의 냉엄한 심판에서 살아남는 노래들도 있다. 클래시가 자신들의 승인없이 싱글을 발매한 음반회사에 대한 공격으로 'Complete Control'이라는 곡을 내놓았을 때만 해도 그 곳이 20년 뒤에도 사람들에게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그들은 '리모트 콘트롤'을 내놓는다고 말했다'라는 가사는 노래 첫 구절로 확실히 별로다). 하지만 그 노래는 여전히 순수와 냉소와 예술적 발기부전에 대해 말하고 있다. 'Nelson Mandela'(더 스페셜스의 1984년 곡)는 이 위대한 인물이 이미 석방된 뒤에도 시대에 뒤떨어진 노래로 들리지 않는다. 그 노래는 삶, 다시 말해서 위대한 삶, 중요한 삶, 잘 꾸려온 삶을 찬양하므로, 저항의 의미로 만들어졌던 본래의 뜻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반명 닐스 로프그렌의 'Keith Don't Go'는 롤링 스톤스의 기타리스트에게 1977년에 토론토로 가지 말라고 애걸하는 노래다. 키스가 마약 소지죄로 체포될 것이기 때문이었는데, 그 당시조차도 그런 일은 누군가가 전념을 기울일 만한 것이 아니며(키스가 토론토로 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은 아니다), 따라서 세월에 흐른 뒤에 숨은 깊은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노래가 될 수 없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코미디언 노먼 군스턴은 라이자 미넬리의 'I'm Liza with a Z'라는 노래를 부른 다음 왜 사람들이 그 노래를 더 많이 리메이크하지 않는지 어리둥절하다고 말하곤 했다. 닐스 로프그렌도 그와 똑같이 키스 돈 고로 자신이 기대한 만큼 저작권료를 벌지 못해서 어리벙벙할지 모른다.

 

결국 가장 오래 살아남는 노래는 사랑에 관한 것이다. 일에 관한 노래도 괜찮다. 강이나 부모나 길에 관한 노래도 괜찮다. 아이들에 관한 노래 중에는 좋은 것이 드물다(그렇다.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지 않으면서 자기 아이에 대한 감정에 관해서 쓰기란 힘들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작곡가들이 클럽 화장실에서 만난 골 빈 모델에 관한 노래들은 혐오감을 주지 않으면서도 너무나 점잖게, 때로 숨 막히게, 잘도 만들어진다). 애완동물에 관한 노래는 무엇보다 피해야 한다. 마약에 관한(특히 여자에 관란 노래인 양 꾸미고 있지만 '실제로는' 마약에 관한) 노래는 듣는 이가 학생일 때와 노래의 숨은 의미를 설명해주고 싶은 사람이 옆에 있을 때까지만 효과를 발휘한다. 농담 또한 정말이지 시간의 시험을 절대 견디지 못한다(랜디 뉴먼의 작품들이 여러 모로 훌륭하기는 하지만, 나는 그 작품들에 대해서 늘 조금 양면적인 느낌을 받아왔다. 편협한 신앙이나 미국 의회 정치의 편파성을 풍자하는 노래를 몇 번이나 듣고 싶을까? 랜디 뉴먼을 계속 듣는 것은 '분노의 포도'를 일 년에 두 번 읽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즉, 1930년대 미국 이주 노동자의 참상에 대해 아무리 큰 관심을 꼳더라도, 그것에 쏟을 수 있는 감정과 이성의 에너지에는 분명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 뛰어난 노래, 추억의 명곡을 트는 라디오 방송과 세월도 시들게 할 수 없는 노래는 사랑의 감정에 관한 것이다. 작곡가가 그 소재에 무엇을 더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그 사랑, 낙담과 반전과 비탄과 황홀을 수반한, 조증과 무감각과 울증을 동반한 그 사랑이 음악 그 자체에 대한 자연적인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복잡한 일들(가령, 캐나다 사법 질서나 성 정체성 인정 연령)에 관한 노래는 매개체가 근본적으로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하는 문제를 상기시킨다. 즉, 이런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다. 왜 이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있지? 왜 신문에 기고하거나 전화 고발 프로그램에 대고 말하지 않는 거야? 게다가 어쨌든 에스키모의 비참한 처지를 그리거나 표현하는 데 만돌린 연주가 어울리기나 하나? 그러나 마음의 일들을 가사로 쓰는 것은 관행이기 때문에 언어는 어색함을 벗고 투명해지고, 듣는 이는 가사를 곧장 지나쳐 음악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사랑에 관한 가사는 마치 하나의 악기처럼 변하며, 따라서 사랑 노래는 뜻하든 뜻하지 않든 순수한 노래가 된다. 우리의 이별에는 우리의 노래보다 더 많은 멜로디가 담겨 있다. 우리의 이별에는 우리의 노래보다 더 많은 멜로디가 담겨 있다. 'You Had Time'(애니 디프랑코)이 특별할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이 때문일 것이다.

- p. 78-82 닉 혼비 지음, '닉 혼비의 노래(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