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책의 온도

양화 2011. 12. 16. 21:30

 

궁정 대례복을 입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장 바티스트 앙드레 고티에 다고티(1740~1786), 1775, 캔버스에 유채, 160x128cm ⓒPhoto RMN-GNC media, Seoul, 2010

 

그날 밤은 몹시 어둡고 폭풍우가 곧 몰아칠 듯 유난히 구름이 많았다. 그는 아름다운 꽃들은 이미 다 사라지고 폐허만 남은 정원을 천천히 걸어갔다. 트리아농 궁에 다다랐을 때 마침 밤 9시가 되었다. 궁 주위에는 잡초만 가득했고 문짝이 다 부서져서 기괴하기까지 했다.

비감에 젖어 폐허를 돌아보던 그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플루트와 하프 소리를 듣게 됐다. 텅 빈 트리아농 궁에서 나오는 신비한 소리에 그는 놀랐다. 그것은 그가 12년 전 오스트리아 궁정의 추천으로 앙투아네트가 머물던 이곳을 방문했을 때 본 아름다운 탁상시계의 소리였다. 놀란 그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궁으로 들어서자 음악이 갑자기 멈췄다. 거기에서 그는 반쯤 부서진 앙투아네트의 시계를 발견하게 된다. 음악이 사라진 뒤로 다시 적막이 찾아오고 주인을 잃은 성은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잠을 자고 있는 듯했다. 마치 그 주인이 다시 세상에 다시 올 수 없는 깊은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프랑스 왕조는 무너지고 그 오랜 영광은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상처를 알지 못하는 무심한 관광객들은 오늘도 무심히 베르사유 궁의 아름다움을 예찬한다.      - 이지은 지음, 귀족들의 은밀한 사생활 p. 367 

 

책에는 온도가 있다. 그건 때로는 저자가 갖고 있는 것일 때도 있고, 저자의 감정과 글이 갖고 있는 문체적 특징이 빚어내는 화학적 작용으로 인한 것일 때도 있다. 분명한 것은 저자가 책의 제재에 갖고 있는 애정의 정도랄까, 절박함 같은 것을 고스란히 반영한다는 거다. 어떤 책의 경우는 그 온도가 단박에 느껴지지만 어떤 경우에는 비슷한  책을 나란히 읽었을 때에야 분명해진다. 이번에 읽은 두 권의 책 '빅토리아의 비밀'(이주은 지음, 한길아트)과 '귀족들의 은밀한 사생활'(이지은 지음, 지안)이 그런 경우다. 앞의 책이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을 제재로 한 그림들을 통해 그 시대를 조망했다면, 뒤의 책은 비슷한 시기의 프랑스 상류사회의 생활용품(전문용어로 오브제 아트라고 한단다)을 통해서 그 사회를 보여준다. 저자들의 이름도 비슷한데, 일껏 전공한 공부와는 무관한 데서 새 길을 찾았다는 인생 역정도 비슷한 게 꼭 쌍둥이 책 같다. '빅토리아의 비밀'이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 그림을 통해 특히 신화와 현실 사이의 여성, 화가 혹은 사회가 욕망을 투사한 대상으로서의 여성에 집중하고 있다면,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제목이 좀 엉뚱하게 느껴져서 소설가 김중혁 말대로 같은 책에 각기 다른 제목을 붙여 제목이 과연 판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해보고 싶다, 역시 김중혁 말대로 돈지랄이겠지만...)'은 기술에 불과했던 생활용품이 사람들의 어떤 욕망에 의해 예술이 되어갔는지, 그리고 어떤 욕망에 의해 괴물이 되어 파괴되었는지를 그린 한편의 서사시 같다. 당연히 뒤의 책이 더 뜨겁다.  

 

위에 인용한 글은 책의 거의 마지막 부분으로 가구와 건축 장식이 예술로 꽃피우던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계급이 무너지고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국외로 달아나기 바빴던 왕족과 귀족의 집이 털리고 그들의 가재도구가 불타던 시절의 이야기다. 왕궁의 귀중품을 보관하던 창고가 습격 당하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그 광기가 어느 정도였냐면 1793년에 베르사유 궁의 모든 물건을 통째로 경매에 붙인 것은 약과요, 왕의 무덤도 특별할 필요가 없다며 왕가의 장지였던 생드니 성당의 묘지를 파헤쳐 죽은 왕들의 미이라를 전시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때, 1796년 베르사유 성을 산책하던 한 독일인 의사 마이어가 트리아농 궁 근처에서 겪은 일을 적은 것이다. 불태워지고 파괴되던 광기 어린 소란의 시간이 급박하게 지나가고 이 대목이 나오는데, 저자의 안타까움과 한숨이 만져질 듯 느껴져서 가슴이 뭉클하기까지 했다. 민중은 굶어죽어가는데 향락을 일삼은 천인공노할 왕족과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물건들일 뿐이야, 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의자를 만들고 장농을 만들던 장인들이 혹여라도 제 가족에 누가 될까, 혁명세력을 위해 단조롭고 평범한 가구들을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귀족들, 왕족들의 가구에 새겨진 자신들의 이름을 남 몰래 지우는 모습, 또 혁명기의 파리 시내 곳곳에서 불태워졌던 자신들의 가구를 숨 죽이며 지켜보았을 모습을 떠올리면 읽는 사람들도 저자의 안타까움에 공감하게 된다. 처음엔 책의 온도차가 저자의 절박함에서만 비롯되었을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해보니 책의 소재 자체가 갖는 온도차도 있을 듯하다. 그림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보는 거지만 생활용품은 만지고 접촉하는 것이니까. 삶의 반영도 더 직접적이고 노골적이리라.

 

책의 온도는 독자들이 느끼는 감동과 물론 정비례 관계다. 뜨거울수록 감동적이다. 전에는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는 것도 감동의 한 부분을 차지했는데, 의자 한 종류의 명칭만도 카브리올레, 베르제, 부와이와즈, 포테이유 드 뷰로, 리 드 허포, 두체스 브리제스 등으로 복잡하니 이제 그것에까지 감동하기 버겁다. 그래서 책의 온도에 더 민감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