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다 문득
"... 내가 레지스탕스 활동에 바친 세월, 그리고 프랑스의 '전국 레지스탕스 평의회'가 70년 전에 구축한 개혁안을 여기서 돌이켜보고자 한다.... 이 개혁안이 제안한 것이 향후 나치로부터 해방된 자유 프랑스가 지켜나갈 원칙과 가치, 곧 프랑스 현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될 가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것이 이러한 원칙과 가치들이다. 우리가 몸 담고 사는 사회가 자랑스러운 사회일 수 있도록 그 원칙과 가치들을 다 같이 지켜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른바 '불법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 언론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결코 이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레지스탕스의 개혁안이 명시한 바는 '모든 시민에게, 그들이 노동을 통해 스스로 살길을 확보할 수 없는 어떤 경우에도 생존방도를 보장해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회보장제도의 완벽한 구축, 늙고 병든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삶을 마칠 수 있게 해주는 퇴직연금제도'였다. 또한 이 개혁안은 '공동노동의 결실인 대표적인 생산수단 - 에너지원, 지하자원, 보험회사, 거대 은행들 - 을 국가로 복귀시키는 것', '경제계·금융계의 대재벌들이 경제 전체를 주도하지 못하게 하는 일까지 포함하는 진정한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 정립' 같은 것들도 권고했다. 특정인의 이익보다 전체의 이익을 우선해야 하며, 노동계가 창출한 부를 정당하게 분배하는 일을 금권(金權)보다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지스탕스가 제안한 것은 '파시스트 국가들의 모습을 본떠 구축된 전문적 독재에서 놓여난, 일반의 이익을 특정인의 이익보다 확실히 존중할 합리적인 경제조직'이었다. ... 진정한 민주주의에 필요한 것은 독립된 언론이다. 레지스탕스는 이 사실을 알고 강력히 요구했으며 '언론의 자유, 언론의 명예, 그리고 국가, 금권, 외세로부터 언론의 독립'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레지스탕스에 이어 1944년부터 각계각층이 언론에 대해 줄곧 주장해온 바도 바로 이것이엇다. 그런데 오늘날 바로 이 '언론의 독립'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레지스탕스가 호소했던 바는 어떤 차별도 없이 '프랑스의 모든 어린이가 가장 발전된 교육의 혜택을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2008년 실시된 개혁은 레지스탕스의 이 생각에 역행하는 내용이었다. 젊은 교사들은 그 개혁을 실제 교육현장에 적용하는 것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 그들은 분보하여 이런 처사에 '불복종'했다. 그들은 이 개혁이 프랑스 공화국이 내건 '학교'의 이상과 너무 거리가 멀며, 부유층만을 위한 것으로 더 이상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정신을 충분히 계발시킬 수 없는 개혁이라도 판단했다.
그러니까 오늘날 문제가 되는 것은 레지스탕스가 사회적으로 얻은 성과의 토대 그 자체인 것이다.
- 스테판 에셀 지음, 분노하라, 9-12
읽은지 한참 되었지만 잊지 않기 위해 적어둔다. 그 짧은 책을 읽으면서, 옳은 말은 길지 않다, 아니 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아흔세 살의 레지스탕스, 그렇다, 진리는 짧다. 책 가격이 더 쌌다면 어땠을까... 정말 팜플렛처럼, 대학생들이 다 하나씩 들고 다니면 세상이 변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다가 책이 생필품도 아니고 더 싸다고 해서 더 많은 사람이 사는 건 아니겠지... 체념했다. 이 대목을 새삼 꺼내 읽은 건 여행 생각이 나 꺼내든 에릭 메이슬 책에서 이런 구절을 만났기 때문이다.
"역사가나 심리학자보다 예술가가 더 잘 알고 있다. 문명의 함정은 얇은 베니어판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아한 문화, 언론 출판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 법률의 보호, 사회적 속박 등은 물이 귀해지면, 실업률이 올라가면, 근본주의자들이 증가하면, 폭군이 손을 뻗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버린다. 르네상스도 중세로 급락할 수 있다. 훌륭한 제도들이 몇 백 년 동안 변함없이 유지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앞으로 몇 백 년 후에도 그것이 여전히 살아남을 것이라 낙관할 수 있을까?"
- 에릭 메이슬 지음, 보헤미안의 파리, 154
이명박이 대통령이 될 때, 사람들이 그랬다. 이제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게 점점 나아지면서 오래 유지되었기 때문에 이명박 혼자 망칠 수는 없을 거라고, 차라리 망치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그러면 거봐, 우리가 뭐랬어, 그럴 수라도 있을 텐데, 그랬다. 헛소리였다. 수백 년이 지속된 것들이 몇 백 년 후에도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믿지 말자. 계속 지키고 계속 싸우고 계속 사랑하고 계속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