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이러한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있다

양화 2011. 7. 4. 21:40

자연선택은 불가능의 펌프다. 통계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생성하는 과정이다. 자연선택은 생존에 도움이 되는 무작위적인 작은 변화들을 체계적으로 포착하고,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긴 시간에 걸쳐 아주 조금씩 그것을 축적하여, 결국 진화로 하여금 불가능과 다양성의 산을 오르게 한다. 그 산의 높이와 넓이에는 한계가 없는 듯하다. 그 비유적인 산을 가리켜 나는 '불가능의 산'이라고 부른다. 자연선택이라는 불가능의 펌프는 생물의 복잡성을 '불가능의 산'으로 밀어올린다.   p. 549-550

                                                                                                                                                                          - 지상 최대의 쇼

 

막판 100여쪽을 남겨놓고 한 달을 놀아버린 '지상 최대의 쇼'를 마무리하면서 귀찮다고 이 마지막 장을 읽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 했나,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랬더라면 '지상 최대의 쇼'를 읽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뻔했다. 부록으로 덧붙인 '역사부인주의자들'을 빼고 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이러한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있다'는 통째 암기하고 싶은, 정말 절창이다. 이 장은 다윈이 쓴 '종의 기원'(그것도 반드시 초판, 2판부터는 이런저런 이해관계, 특히 종교계의 압박으로 많은 구절을 바꾸거나 삽입하거나 삭제했다고 한다)의 마지막 문단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것이었다. 그 짧은 문단 안에는 그가 앞서 설명한 진화의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

 

"따라서 자연의 전쟁으로부터, 기근과 죽음으로부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 즉 더욱 고등한 동물이 직접 생성되어 나온다. 이러한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있다. 최초에 소수의 형태 혹은 하나의 형태에 갖가지 능력을 지닌 생명의 숨결이 불어넣어졌다. 행성이 고정된 중력의 법칙에 따라 영원히 돌고 도는 동안, 이토록 단순한 시작으로부터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멋진 무한한 형태가 진화해 나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p. 526

 

리차드 도킨스의 그동안의 책들이 진화는 기정 사실이고, 그게 어떻게 작동했는가에만 집중해왔다면 이 책은 진화, 그 자체를 증명하려고 한다. 물론 이것은 큰 야심이다. 우리는 진화를 목도할 수 없는, 너무 늦게 범죄 현장에 도착해버린 탐정들이니까. 하지만 현장의 증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일은 가능하다. 이 책은 그 증거 수집과 분석에 관한 이야기다. 중간중간에 나오는 생물학적 설명들을 다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고, 이해한다고 해도 최대한 단순화해서 - 예를 들면, 음, 생명의 시작에는 그러니까 DNA와 단백질, RNA 정도가 관여했다고 볼 수 있겠군, DNA가 설계도면 같은 거라면 단백질(아미노산)은 실제 생명체의 부분부분을 만든 재료 같은 것이고, RNA는 그 둘의 기능과 어설프게 공유한 것, 그래서 어쩌면 생명의 시작일 수도 있는 것, 또 음.. 어느 개체와 어느 개체의 DNA가 몇 % 같다, 는 건 DNA를 섞었을 때 얼만큼 서로 잘 엮이느냐를 계산한 거군.. 뭐 이런 식으로 - 이해했지만 각 장에서 만나는 진화의 숱한 증거들을 만날 때마다 그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입 딱 벌리고 열렬히 박수치는 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너무 치밀하고 복잡하고 놀라워서 꼭 설계자나 계획자가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생물의 질서나 조직, 구조 등은 "전역적인 규칙들에 의해 생긴 게 아니라 여러 차례 반복되어 국지적으로 지켜지는 규칙들의 부산물로 생겨난 것"(p. 298)이라는 점. 진화나 발생이나 선택은 명백하고 자동적이지만 의도적인 개입은 없었다는 점이 진화의 핵심이다. 상동기관, 생물 각 개체의 골격의 유사성, 유용한 유전자와 닮았지만 그 자체는 쓸모없고 전사되지 않는 유전자인 유사유전자, 기능을 잃고 유물로만 남은 흔적기관 등은 모두 우리 몸에 쓰인 진화의 역사다. 그렇게 저렇게 따라가다 보면,(곤충의 체절 형성과 척추동물의 체절 형성은 혹스 유전자하는 일군의 공통적 유전자로 중개되며, 혹스 유전자들은 곤충과 척추동물과 기타 많은 동물에서 몹시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단다. 심지어 염색체 상에 배열된 순서도 다들 같다!!) "모든 동물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운 친척들이다."(p.477)

 

포식자와 먹잇감 사이의 무기경쟁에 관한 장을 보면서는, 고통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리차드 도킨스는 고통에 대해 딱 잘라 이렇게 말한다. "고통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부산물이고, 피치 못한 결과다"(p. 519) 라고. 이 말의 앞에는 바이러스의 무익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나콘다나 호랑이에게 잡아 먹혀 최후를 맞는다면 생명의 제왕들 중 하나의 안녕에 기여한다는 기분이라도 들지 모르겠지만 감기 바이러스는 도대체 무슨 필요로 세상에 태어났단 말인가. 바이러스의 DNA에는 그야야말로 헛된 무의미함만이 가득 적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무익함'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감상적이고 인간적인 넌센스인가를 되물으며 "자연선택은 온통 무익함"이다. 자연선택은 자기 복제를 지시하는 지침들이 자기복제하며 생존하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거다. 그러니 자애로운 신이 창조한 세계에 어떻게 악이니 고통이니 하는 것들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은 덧없는 것이다. 통증은 통증을 겪는 개체의 생존을 증진시키기 위한 다윈주의적 장치다. 악이나 고통은 유전자의 생존 방정식에서 보자면 이 변으로든 저 변으로든 어차피 계산되지 않는다. 

 

"자연선택이 뭔가를 '원한다'고 표현해도 좋다면, 자연선택은 개체가 조국이나 이데올로기나 당이나 단체나 종에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자연선택은 고통이라는 경고를 개체가 무시하는 것에 '반대한다'. 자연선택은 우리가 생존하기를 '원한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번식하기를 원한다. 국가나 이데올로기, 혹은 동물의 세계에서 그에 상응하는 다른 어떤 목표 등은 잊기를 원한다."    p. 521

 

이 대목을 읽다 보면, 인간이 그저 생물의 한 종, 아니 그저 DNA 복제 기계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발달한 뇌 덕분에 부산물로 얻게 된 윤리니 철학이니 하는 것들은 그럼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싶다. 다만, 인간이 그저 생물의 한 종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우리 인식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거 아닐까. 사람들은 가끔 우리가 다른 생물과 다르다고, 아니 정확하게는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는 듯 하니까 말이다. 암튼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신기하고도 귀엽고 간혹은 끔찍한 동물(다윈이 만약 이걸 만든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끔찍한 사디스트일 것이라고 했던 맵시벌이 대표적이다)과 식물이 모두 우리의 친구라니 어쩐지 안심된다.

 

도킨스 말대로 "우리가 여기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은 거의 믿기 힘들 정도로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가 다소간의 차이를 두고 우리와 닮은 동물들로 구성된 풍성한 생태계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 우리와 덜 닮았디만 우리에게 모든 영양소를 공급하는 식물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 우리의 먼 선조를 닮았고 우리가 이 땅에서 주어진 시간을 다하고 돌아갈 때 우리를 부패시킬 박테리아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것 역시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다."(p. 563) 

 

생존에 유리하도록 뇌를 키워온 진화과정의 부산물 덕에 진화라는 지상 최대의 쇼를 구경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다. 그 길을 안내해준 도킨스에게도 건배!

 

지금은 머리 숱이 좀 적어졌지만.. 번역자의 마지막 말을 따라 리차드 도킨스의 만수무강을 빈다.

 

* 읽는 동안 쪼금 불편했던 건, 진화를 부인하는 많은 사람들에 대해 안타까와하다 못해 분노하고 비아냥거리는 데 에너지를 쏟은 부분들이다. 저자 입장에서는 속 터지고 그들로부터 계속 공격받는 것도 피곤해서 그랬겠지만, 아유, 많이 배우고 인간성도 좋은 당신이 참으세요, 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