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증오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여행 내내 함께한 책은 읽고 있던 "뮤지코필리아"와 "미학적 인간". 뮤지코필리아는 원제 그대로 음악과 뇌에 관한 이야기. 인간이 가진 음악적 경험과 능력이 뇌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수많은 사례로 풀어나가는 이 책은 우선, 신기하고도 괴이한 음악적 능력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관심을 끈다. 많이 들어본 음악 서번트의 이야기를 비롯해서 음악에서 색채를 보거나 맛을 느끼는 음악공감각 능력자, 반대로 음악에 대해 아무런 정서적 반응을 느끼지 못하는 실음악증을 가진 사람들, 병이나 사고로 인해 음악에 대한 능력이 새로 생겨나거나 사라져버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흥미롭다. 물론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상당히 곤란해지기도 한다.
"윌리엄스 증후군자의 뇌는 일반인의 뇌에 비해 평균적으로 20퍼센트 정도 작으며 생김새도 상당히 특이하다. 크기와 무게가 줄어든 부위는 뇌 뒤쪽에 위치한 후두엽과 두정엽이고, 측두엽은 정상이거나 오히려 일반인보다 큰 경우도 있다.... 일차 청각 피질의 크기는 윌리엄스 증후군자가 더 크다. 그리고 측두평면에서 중요한 변화가 관찰되었는데, 이는 언어와 음악의 지각, 그리고 절대음감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중요한 구조물로 알려져 있다." p. 457
설명이 쉬운 편이지만 후두엽이나 두정엽, 측두평면 같은 게 도대체 우리 뇌 어디쯤인지 알 수 없는 나 같은 독자로서는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할 수밖에. 읽는 동안 아, 아쉽네.. 싶었던 것은 인간이 태어날 때는 모두 절대음감의 소유자이지만 언어를 구성하고 종합해가는 규칙을 터득해감에 따라 절대음감도 사라지고 음악 능력도 감퇴해간다는 사실이었다. 공감각 능력도 마찬가지. 지금과 같은 언어가 생기기 전의 언어는, 그러니까, 음악과 말 중간쯤 되는 것이었을까. 인간이 생존에 더 적합한 형태로 진화하기 위해 예전에는 종합적이었던 우리 능력은 하나하나 분리되어갔을 거란다. 그런 여러 능력이 영속적으로 우리에게 남기 위해서는 다른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야만 한다는데, 저자가 지목한 것은 시력상실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시력을 얻는 대신 굉장히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셈이다.
음악 서번트들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그들은 일부 능력이 향상되는 대신 다른 능력은 손상되거나 미발달 상태로 남아있다. 무언가를 잃는 대신 다른 것을 주는 이런 섭리는 저자 말마따나 "한 인간 존재가 어떤 식으로 조직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수많은 괴이한 사례들을 통해 그것이 뇌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여러 근거를 들어 설명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이 책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인가 싶지만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강력한 대목인 클라이버와 데버러 이야기에 이르면 저자가 정작 말하려는 건 그게 아닐지 모른다 싶다.
영국의 저명한 음악가이자 음악학자 클라이브 웨어링는 헤르페스 뇌염에 감염되어 기억을 담당하는 뇌가 크게 망가졌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그는 "순간 속에 고립된 존재"였다. 클라이브의 사건 기억은 몇 초를 넘지 못했기 때문에 방금 만났던 사람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단 몇 초를 수 십년 동안 반복해서 산다. 자기 몸으로 구조를 익힌 자기 집에서 화장실에 가거나 침실을 찾아갈 수는 있지만 설명할 수는 없다. 악보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피아노를 열면 연주할 줄 안다. 그에게 있는 것은 푸르스트의 말처럼 "동물의 의식 깊은 곳에 숨어 나풀거리고 있는 듯한 존재의 가장 초보적인 감각"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내인 데버러만큼은 문제없이 알아보았다.
모든 과거의 기억을 잃고 매순간을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 마주치는 그에게 어째서 데버러만은 예외인가. 헤르페스 뇌염이 침범할 수 없는 뇌의 어떤 깊은 영역, 그런 게 인간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재적이고 심층적인 기억, 그것은 바로 정서적인 기억이다. 뇌염에 감염되기 전, 몇 년 동안 깊이 사랑했던 감정만큼은 역사상 가장 중증의 기억상실증 환자로 알려진 클라이브에게서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음악. 이것은 의식적으로 습득된 기억이지만 뇌에서 운동 패턴으로 암호화된 덕분에 자동적이 된 것이다. 클라이브는 발병한지 20년이 되었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단다. 데버러를 알아보는 것도 오로지 그녀가 눈앞에 있을 때뿐이다. 클라이브는 데버러가 그를 스쳐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뿐 아니라 그녀를 보지 않을 상태에서는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말하지 못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공간과 시간에서 완전히 뚝 떨어져나왔다. 더 이상 내적 연속성을 이루며 살지 않는다. 우리와 같은 의미의 삶이 아니다. 그런 그가 다시 자신으로 돌아와 생명을 부여받을 대는 건반을 연주하거나 데버러와 함께 있을 때뿐이다. 클라이브가 열망하는 것, 또는 얻을 수 있는 것은 과거의 것, '한때' 일어났던 사건의 기억이 아니다. 현재를 요구하고 채우는 것이며, 이것은 그가 행위의 연속적인 순간에 완전히 빠져들 때에만 가능하다. 심연의 다리를 잇는 것은 '지금'이기 때문이다." p. 302-303
재미있는 것은 기억을 다 잃어도 인간에게 남는 정서적 기억으로 사랑 같이 장려할(?) 만한 것만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 고통 역시 그렇다. 이런 게 한 예가 될까. 실어증에 걸린 사람들도 자동적 언어는 말할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친숙한 노래란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더 있는데, 그게 바로 저주다. 실어증에 걸리면 명제적인 구절은 말하지 못하지만 노래하거나 저주를 퍼붓는 건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인간은 이런 존재인 건가. 이 책에 따르면 인간이 지금의 존재가 되기까지 음악은 많은 일을 해냈다. 음악이 가진 운율과 리듬은 인간이 많은 양의 정보를 기억하고 보존하고 대물리는 데 큰 역할을 했고(이건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 가운데 오로지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란다), 박자는 인간의 운동능력과 감각을 활성화시켜줬다. 인간의 진화가 유인원의 '일화성' 삶에서 '미메시스'의 문화로 이동한 건, 모두 인간이 가진 음악이라는 통합적 능력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음악이 인간에게 해주는 것은 많고도 많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아주 신비롭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성찰하고 또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관찰한 끝에 이렇게 단언한다. "예술 가운데서도 음악은 완전히 추상적이며 대단히 감정적이라는 점에서 유일무이하다. 특정한 것이나 외적인 것을 재현하는 힘은 없지만 우리의 심적 상태나 감정을 표현하는 데는 발군의 능력을 보인다. 음악은 마음에 직접적으로 스며들고 어떤 매개체도 요구하지 않는다. 디도가 아에네아스를 위해 부르는 애가에 감동받기 위해 두 사람이 누구이고 어떤 사연이 있는지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를 잃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디도가 무엇을 표현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여기에 심오하고도 신비한 역설이 있다. 그와 같은 음악은 고통과 슬픔을 더욱 강렬하게 안겨주지만 동시에 위안과 위로도 안겨준다." p. 418-419
미국에서 여기로 짐을 옮기는 동안 가장 골칫거리는 책과 CD더미(사실 옷 빼고는 이게 짐의 다였다)였다. 둘다 무겁고 부피도 컸다. 남편에게는 책도, CD도 별로 소용없는 물건들이라 괜히 눈치가 보였다. 어차피 몇 달 뒤 이사를 하려면 도로 짐을 싸야 해서 당장 입을 옷들만 꺼내놓고 가져온 짐들을 싸온 그대로 두어 음악없이 2주일쯤 시간이 흘렀다. 여행의 기억과 함께 읽은 책을 다시 뒤적이면서 CD는 몇 장 꺼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머릿속은 복잡하고, 손은 뭘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매일 해치워야 할 일은 널렸고. 이럴 때 음악과 책은 그저 도피처일뿐. 그런 생각이 들어 CD가 든 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 책에는 이외에도 재미있는 사실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어머니와 그 자신이 글자를 보면서 색깔을 보는 공감각 능력자였다는 것, 그리고 정작 그 자신은 음악에 대해 아무런 정서적 감정을 갖지 못하는 실음악증이었다는 것. 나보코프의 자서전을 읽을 때, 각각의 알파벳에 대해 색깔로 설명하는 대목이 나왔을 때 그게 일종의 심상 같은 건가 보다 생각했었는데, 그게 그런 거였구나 이해하게 되었다.
또 찰스 다윈 역시 말년에 음악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잃어버렸단다. 젊은 시절에는 음악을 좋아하고 많이 들었다는데, 인간이 언어를 종합하고 구성하는 능력을 얻는 대신 아기 시절의 음악적 능력을 잃는 것처럼 그도 자료를 종합하고 구성하는 일을 오랫동안 하다가 그런 능력을 잃은 듯하다. 반대로 비트겐슈타인은 아주 뛰어난 음악적 능력의 소유자였단다. 집안 내력이지 싶은데, 비트겐슈타인의 형 파울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대전에서 한 팔을 잃고도 외팔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린 유명한 음악가다. 재미있게도 '미학적 인간'의 마지막은 마치 '뮤지코필리아'에서 뽑아낸 듯 서로 닮아있다. 빅토르 주커칸들의 '음악과 상징'을 인용하고 있는 것까지. 재미있는 우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