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성의 비밀
#1
완벽한 인간은 매력적이지 않다. 어딘가 불완전한 인간이 좋다. 불완전한 개인의 빠진 부분들을 하나하나를 살펴보다 보면, 인간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떤 부분들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지, 또 어떤 부분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지, 인간 이상을 만드는지 점점 분명해지는 것 같다. 모든 인간이 비슷한 정도로 훌륭하다면, 우리는 끝내 우리가 누구인지 모르게 될 것이다. 근현대 인류 역사상 최고의 창조성을 보여준 17명의 이야기를 담은 "창조자"들에서 내 마음을 끈 것은 그들만이 가진 보통 인간과는 다른 창조성의 비밀(대개 타고났더라)보다 이제까지 상찬되어온 인간의 덕성을 완벽하게 갖추지 못한(정도가 아니라 많이 부족하기까지 한) 어떤 부분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좋은 인간이라고 그려놓은 이상향 인간의 초상화 가운데 이지러진 부분 같은 거 말이다.
가령, 근대 서구에서 가장 위대한 풍경화가로 꼽히는 윌리엄 터너(조지프 말러드 윌리엄 터너,1775-1851)의 '탐욕' 같은 거. 열살 때 이미 특별한 재능을 보여준 터너는 죽는 그날까지 평생 일만 하다 죽었는데, 자신의 그림을 비싼 값에 파는 데 온통 관심을 쏟았다. 심지어 개인 작업실 겸 미술관에 구멍을 뚫어놓고 누군가가 자기 그림을 베끼거나 메모하지 않는지 감시할 정도였다.(너무 가까이서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는 "그림을 보라고 그렸지 냄새 맡으라고 그린 줄 알아?" 하고 소리를 지르곤 했단다) 이런 탐욕 덕에 그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고(유화 1000여 점, 수채화와 스케치는 2만 점), 한가한 여행은 평생 해보지 않았다. 그가 수채화를 많이 남긴 것은 순전히 더 많이, 더 빨리 그리려는 욕심 덕이었다.
경제성과 생산성에 대한 집착은 터너에게 색을 기억하는 놀라운 능력을 계발하게 해주었고, 눈보라나 폭풍 같은 불가항력의 상황에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강인함을 발굴해주었다. 결국 그의 창조성의 비밀은 그런 탐욕이었던 것이다. 그의 영악함이나 무례, 탐욕, 거래의 비밀에 관련된 일화는 무수히 많다. 그의 그런 무례 때문에 탁월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또 그토록 염원했던 것임에도 왕립 미술원의 원장이 되지 못했다. 그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았고, 또 믿지도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는 빛의 변화에 민감해 온갖 종류의 빛 - 심지어 그 속도마저 - 을 독창적으로 그려냈지만 인간을 그리는 것에는 더할 수 없이 서툴렀다. 나는 그가 어린 시절, 몇 시간이고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다가 돌아와 그림을 그리곤 했다는 구절을 읽으며 그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몇 시간 동안, 미묘하게 변화하는 하늘색과 느릿느릿한 구름의 움직임에 마음을 빼앗긴 어린 터너. 어쩌면 그를 천재로 만든 것은 탐욕도, 성실함도 아닌, 어린 터너를 사로잡았던 아름다움에 대한 원초적이고 강렬한 끌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아름다움에 대한 강렬하고 원초적인 추구는 고딕을 열렬히 사랑했던 오거스터스 웰비 노스모어 퓨진(1812-1852)에게서도 엿보인다. 그 역시 뒤러와 터너처럼 세 살 때 처음 연필을 쥔 후에 죽을 때까지(일찍도 죽었다) 단 하루도 연필과 붓을 놓지 않았다. 퓨진은 영국과 유럽의 고딕 건물을 여름마다 보러 다녔고, 수많은 고딕 건물들을 보고, 또 보고, 그리고 또 그렸다. 열다섯 살에 처음 가구 주문을 받은 이 사람은 파산도 스무 살에 겪었는데, 완벽주의는 버리지 못했지만 관리의 간접비용을 없애려 최선을 다했다. 퓨진은 진정한 고딕 양식을 추구하고 그것을 정확하게 재현했지만 어느 중세작품과도 같지 않았다. 그것이 퓨진의 창조성의 증거였다. 폴 존슨은 위대한 창조성 뒤에서 늘 강한 의지로 다져진 기초가 있다고 믿는 듯하다. 터너도, 퓨진도, 바흐도, 뒤러도, 발렌시아가도(아, 그의 단춧구멍!), 월트 디즈니도,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T.S. 엘리엇도 그랬다. 그들은 모두 예술가이기 전에 기술자였다. 특히 퓨진과 그의 영향을 받은 모리스는 산업화 시대의 취약한 미적 감각에 반기를 들었지만 "예술이 기술의 궁극적 형태이며, 기술이 모든 창조적 활동의 토대"(252)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들이 고딕을 특별히 사랑했던 것도 고딕 양식이 자연에서 발생했지만 개별 장인들이 가진 기술을 통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2
폴 존슨이 다룬 열일곱 명의 창조자들 가운데, 여성은 단 한 명이었다. 제인 오스틴. 그녀 이야기를 하면서 저자는 역사적으로 창조적 여성들은 외롭고 고립되고 절망적인 삶으로 추락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인류 역사의 보물로 마땅히 우리에게 알려져야했던 수많은 여성 예술가들을 호명했다.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는 단지 여섯 명의 고대 여성화가의 이름이 실렸고, 조르조 바사리는 16세기가 되어서야 그 이름 외에 플랑드르 화가 여섯 명과 이탈리아 화가 열 명의 이름을 추가했을 뿐이다.(소포니스바 안구이솔라와 그녀의 세 자매 포함) 그러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그녀조차!!), 카라바조의 여성 제자들, 네덜란드의 유디트 레이스테르 등은 20세기까지 언급되지 않았다. 영국 왕립 미술원은 1960년대까지 여성회원에게 해마다 열리는 미술원연회에 참가할 자격조차 주지 않았다. 여성의 자리는 가정에 있다고 보았던 근대에 여성예술가들을 가장 혹독하게 억압한 것은 다름아닌 가족이었다.
영국의 왕립 미술원 초대 원장 조슈아 레이놀즈는 누이가 초상화가로 나서겠다는 것을 갖은 수단을 동원해 막았으며 워즈워스는 여동생 도로시의 자연관찰력을 자기 시에 이용했으면서('수선화'는 순전히 그녀의 자연기록 덕에 탄생한 시란다) 그녀가 스스로 시를 쓰는 것은 반기지 않았다. 로세티는 자신보다 뛰어났던 여동생 크리스티나의 재능을 무시했다. 근대 최고의 여성화가인 메리 커샛도 '동네 화가'라는 평을 들었으며, 캐럴린 세인트 존 마일드 메이는 가족에게 굶어죽겠다고 협박한 후에야 겨우 미술수업을 받을 수 있었단다. 오로지 창조적인 활동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해 끝내 비참한 운명을 살아간 여성 예술가들의 목록은 끝이 없다. 그 와중에 후대에 이름자라도 남긴 여성 예술가들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하나는 외모가 아름답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집안이 중산층 이상일 것. 이 두 가지 조건의 대표로 뽑힌 사람은 쇼팽을 비롯, 숱한 당대 남성 예술가들과 염문을 뿌린, 조르주 상드로 더 잘 알려진 오로르 뒤팽(1804-1876)과 남자 이름 같은 조지 엘리엇으로 알려진 메리 앤 에번스(1819-1880). 조르주 상드는 뻑적지근한 집안(아버지인 모리스 뒤팽 드 프랑스빌은 폴란드 왕 아우구스트 3세의 후손으로 나폴레옹의 매제이자 기병대장인 조아생 뮈라 대공의 전속 부관이었고, 상드는 루이 16세, 18세, 샤를 10세와 혈연간이었다) 덕에 방대한 인맥을 자랑했지만 아름답지 못한 외모 때문에 낙오자인 퇴역 장교 뒤드방 남작 차지가 되었다. 허버트 스펜서에게 낯뜨거울 정도로 솔직한 프로포즈의 편지를 보낼 정도로 감성적이었던 조지 엘리엇 역시, 만약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었다면 일찌감치 좋은 집안의 재능있는 남자에게 시집가 글 대신 아이를 낳았을 것이다.(나중에 G.H. 루이스의 정부로 살게 되면서 가족과도 절연해야 했다)
대단한 가문은 아니었지만 지성적인 아버지와 오빠, 소울메이트와 다름 없었던 언니 카산드라가 있었던 제인 오스틴도 소박한 외모의 보통 아가씨였다.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집안 분위기에, 자신이 무엇을 잘 하는지 잘 알았던 날카롭고 냉철한 자기 심판관으로서의 자질, 새로운 것을 만들고 싶어했던 열정과 무모함이 그녀를 여성 셰익스피어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 불가능한 모험보다는 실제 삶이 글감으로서 훨씬 재미있다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달았"(223)고, 자신의 한정된 경험 안에서 그것을 변형하고 다양하게 응용하는 능력을 발휘함으로써 위대한 여성 작가로 남았다.
#3
빅토르 위고나 루이스 컴퍼트 티파니에게서 보이는 세속적 야망은 창조성의 원천은 아니지만 그들의 삶을 흥미롭게 만들어준다. 빅토르 위고는 성욕만큼이나 창조성도 왕성해 문학 분야 가운데 건드리지 않은 분야가 없고, 하다 못해 연애편지라도 쓰지 않은 날이 없다. 여든다섯 살까지 왕성한 성욕을 자랑했지만 철학도, 의지도 없이 평생을 공화파였다가 왕당파였다가 갈팡질팡 인생이었다. 다행히 그는 언어를 감지하는 귀가 발달했고, 그러다 보니 언어를 사랑하게 되었고, 바로 이런 재능이 그를 시인으로 만들었다. 위고는 영국의 디킨스와 자주 비교된다고 한다. 그 둘은 모두 "지칠 줄 모르는 낭만파 작가에다 수많은 창작품을 내놓았고, 괴상한 이야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솜씨도 뛰어났으며, 말문이 막히는 법이 없는 천재 중에 천재에다가, 불가사의한 일과 오래되고 잡다한 것들과 인간의 특성에 애착을 느끼는 사람"(283)이었다. 하지만 그외에는 모두 다른 점 뿐이었다. 위고는 인색하고 야박하며 허영이 가득하고 이기적이었지만 디킨스는 헌신적이고 용기 있고 성실하며 약한 사람들에게 무한한 친절을 베풀었다. 그래서 디킨스는 알면알수록 따뜻함이 느껴지지만 위고는 알면알수록 정 떨어지는 인물이란다.
80이 넘는 긴 생애 동안 성공과 좌절, 상찬과 모욕의 롤러코스터를 탔던 티파니를 요약할 수 있는 말은 이것. "유행이란 경박한 첩이면서 포악한 주인이다."(339) 아르누보 양식을 가장 화려하게 꽃 피웠지만 죽기 직전부터 스며들던 몰락의 기운은 티파니의 죽음 이후 무자비하게 드러났다. 화려한 집은 불타버렸고, 그의 작품들은 헐값에 팔려나갔다. 아서 대통령의 명을 받아 만들었던 백악관의 유리 칸막이는 루스벨트에 의해 산산히 부서졌다. 1935년부터 1955년까지 엄청난 양의 티파니 유리공예품이 폐기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 이후, 그는 다시 부활했다. 그 위로 더 아름다운 색의 유리를 만들기 위해, 더 새로운 모양의 유리를 만들기 위해 실험하고 시도하던 젊은 날의 그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4
하지만 인간의 불완전성에 대한 연민 어린 호감도 피카소처럼 완벽한 악의 화신 앞에 서면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그는 남들은 태어나면서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 두 가지가 모자랐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과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능력이다. 그가 가진 힘의 원천 하나가 바로 이 결핍이었다. 그의 세계 한가운데에는 오로지 피카소의 자리만이, 피카소의 필요와 관심과 야망의 자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다른 누구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427) 그와 염문을 뿌린 숱한 여성들은 말 그대로 성적 노리개에 불과했고, 그의 친구나 가족은 모두 그에게 그저 하나의 도구일 뿐이었고, 그에게 그런 부당한 행위를 할 무한한 권리가 있다고 스스로 믿었다. 소유욕이 강했던 그는 자신의 정부들이 서로 치고 받고 싸우는 걸 보기 좋아했고, 싸우는 도라 마르와 마리테레즈 발테르, 두 여자 옆에서 태연히 '게르니카'를 그렸다. 자신은 내키는 대로 여자를 버렸지만 그는 자신을 떠난 여자를 끝까지 괴롭혔다. 간혹 여자에게 그림을 줄 때는 절대 서명해주지 않을 만큼 비열했다. 그의 곁에 있던 사람은 모두 불행했다. 마리테레즈는 스스로 목을 맸고, 아내는 권총자살했으며 장남은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했다. 그 자신은 살아 생전 백만장자였음에도 정부 중 몇 사람은 궁핍하게 살다 죽었다. 그의 오랜 후원자였으며 최초의 성공을 이끌어냈던 막스 자코브가 나치에 체포되어 독방에서 얼어죽어가며 도움을 요청했을 때도 그는 농담을 던졌을 뿐이다.(자코브는 결국 얼어죽었다) '게르니카'를 그리고 돈 안 드는 집단 항의 서한에 서명은 잘 했지만 나치 피해자들이나 레지스탕스에게 개별적인 도움은 절대 주지 않았다. 공산당원이라는 정치적 지향은 그의 생존과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다지는 데 필요했을 뿐이다.
재현 예술의 모든 요소를 하나하나 폐기해나가던 그는 1910년경부터 아예 자연에 대한 관심을 끊었고, 오로지 자기 마음 바깥세계를 그리는 법이 없었다. 한평생을 도덕적 무질서 속에서 살다 죽은 그를 보면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가 없었다면 현대 미술사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을 거라는 객관적인 평가를 보면서 인류의 유산으로 보존되고 기려질 가치가 있는 예술품이라는 게 그것을 창조한 예술가 자체와 분리된 채 평가될 수 있는 건지... 폴 존슨도 헷갈렸나 보다. "위대한 작가나 화가 또는 음악가가 악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사악한 면과 창조적인 면이 공존했던 천재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피카소처럼 사악한 측면이 인물 전체를 지배했던 창조자는 흔치 않다. 피카소에게서는 사악함을 벌충할 다른 어떤 특징도 찾아볼 수 없다. 내 생각에, 극에 달한 이기심과 사악함은 그의 업적과 뒤엉켜 있다."(431) 결국 인간이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우리에겐 이런 사람도 필요하다라고 말해야 할까.
#5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창조성의 대가에는 영문학의 시조 제프리 초서(1342?-1400, 글쓰기는 그에게 아침식사이자 만찬이자 저녁식사이며, 고기이자 술이고, 삶의 목적이자 위안이자 보상이었으니, 그 자체로 삶이었다, 44), 그칠 줄 모르는 열정과 노력으로 장인에서 예술가가 된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 실용적인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 셰익스피어(1564-1616, 셰익스피어는 '옥스포드 인용문 사전' 중 일흔여섯 쪽을 가득 채운다, 100), 창조성의 유전학을 보여준 성실함의 대명사 바흐(1685-1750) 등도 포함되어 있다.
바흐 부분에서는 특히 이 부분이 좋았다. "고용주의 요구에 맞춰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덧없이 잊힐 작품을 쓸 때조차 그 자체의 논리적, 음악적 완전성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으며, 마치 삶이 온통 그것에 달린 양 모든 작품을 섬세하고 빈틈없는 솜씨로 써 나갔다. 사실 그의 삶이 온통 음악 작업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바흐가 작곡의 의무를 게을리했다거나 음악의 완성도가 그의 기대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면, 그는 분명 자존심을 지키며 살지 못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시류에 편승하는 반복이나 적당히 손쉽게 넘어간 부분, 하다못해 비속한 낌새조차도 찾을 수 없다. 공연을 할 때도, 작곡을 할 때도, 날이 바뀌고 해가 바뀌어도, 심지어 고용주가 흔히 그렇듯 좋고 나쁜 것도 구별하지 못하는 아류라 할지라도 그는 최고의 음악을 선보였다(145)" 자신의 삶의 완벽한 주인이었던 바흐.. 나는 바흐를 존경하기로 했다. -_-
또, 터너와 나란히 동양 풍경화가의 대가로 꼽힌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우리가 흔히 보는 일본 우키요에 풍경화의 전형을 창조한 인물), 영국 국회의사당을 재건한 고딕 건축가 오거스터스 웰비 노스모어 퓨진(1812-1852), 중세 건축의 복원가로 이름 높은 외젠 비올레르뒤크(1814-1879), 대문호 빅토르 위고(1802-1885), 재담의 왕 마크 트웨인(1835-1910, "그는 링컨과 마찬가지로 인종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가 집착한 것은 정의였다. 하지만 링컨처럼 그 역시 잘 웃고 남을 웃기기를 좋아했는데, 그의 경우는 대개 웃음이 정의보다 앞섰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다"(309)-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인종차별 논쟁에 대해서 저자가 한 말이다), 우리에겐 늘 오드리 헵번의 얼굴과 함께 떠오르는 유리공예가 루이스 컴퍼트 티파니(1848-1933), 전통과 보수적 가치를 신봉했으면서도 현대성의 화신으로 남은 시인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1888-1965, 어두운 밤 또는 안개 낀 거리의 불 켜진 출입구에서 손짓하는 여자는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심상이다(350)-그는 아마 평생 동정이었을 거란다. 어릴 때부터 병약했기에 격렬한 신체활동을 수반하는 어떤 일, 성생활이나 스포츠 모두 그와 무관한 일이었단다, 인생에 의미란 없었다(355), 엘리엇에게는 세상의 절대적 무의미에 대한 절망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로 다가왔으며, 그에게 세상은 대체 무엇에 '관한'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곧 공허함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 엘리엇은 "황무지"를 쓰던 중에 "위대한 예술은 모름지기 근본적 권태, 곧 열정적 권태를 바탕으로 한다"라고 말했다(365), 패션 디자이너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1895-1972), 크리스티앙 디오르(1905-1957), 그리고 말이 필요없는 파블로 피카소(1881-1973)와 자연이 인간의 상상력보다 훨씬 풍부한 자원이라고 믿었으며, 인간이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월트 디즈니(1901-196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