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유동하는 공포

양화 2010. 8. 18. 18:36

출판사 산책자의 에쎄 시리즈와 새물결의 왓츠업 시리즈는 근간이 나올 때마다 관심있게 보고 있다. 두 시리즈는 성격도, 지향도 다르지만 비교적 작고 얇은 책(!)이라는 공통점 때문에(왓츠업 시리즈 중 하나인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가 400쪽이 넘으니 딱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은 농담(^^, 하지만 농담 속에 뼈가 있는 법!)이고, 바우만이 이 두 시리즈에 모두 포함되어 있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과연 누구기에,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이기에 이 둘 다에 포함되었을까 호기심이 생긴 거다. 알랭 바디우니, 조르조 아감벤이니 하는 비교적 최신 학자들의 이름을 알게 해준 왓츠업 시리즈에 포함된 '쓰레기가 되는 삶들' 대신 에쎄 시리즈의 '유동하는 공포'를 고른 건 페이지수 대비 책값이 더 싸서라는 것 역시 농담이고^^, 제목 때문이었다. '쓰레기가 되는 삶들' 보다는 '유동하는 공포' 쪽이 지금 내가 알고 싶은 것에 답을 줄 수 있을 거 같아서 말이다. 게다가 푸른숲에서 일할 때, 시도 쓰고 사진도 찍으면서 사회학 박사이기까지 한, 게다가 잘 생기기까지(!) 한 심보선 샘이랑 뭔가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옆구리를 찔렀는데, 바우만 책을 번역해보고 싶다고 자청해서 호기심이 더 불붙었다. 옆구리 찌른 심보선 샘은 교수 임용 문제가 맞물리면서 함께 작업하기로 한 건 유야무야되고 말았지만.

 

시인은 가고 바우만 책만 남은 셈. 아무튼 얇고 어렵지 않으면서 지금 우리 시대에 대해 여러 가지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익한 독서였다. 진작에 읽고 몇 부분 메모해두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남편 접대도 해야 하고 마음 다잡고 앉아지지가 않아 미루고 있었는데, 이러다간 메모 한 줄 못 남기고 그냥 지나갈 거 같아 날 더운 거 핑계(남편이 있을 때는 난로를 켜야 할 지경이었는데, 여름 들어 최고로 더운 날들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로 집안에 틀어박혀 컴퓨터를 끼고 앉은 김에 쓰고 있다. 누가 써내라고 마감 그어놓고 목 조르는 것도 아닌데, 이게 뭔 열성이냐. 묵혀두었더니 잘 써지지가 않아 컴퓨터만 켜놓고 뭉그적거렸더니 컴퓨터가 열 받아서 더 덥다! '유동하는 공포'가 다루는 공포는 근대 이후, 현대의 공포다. 근대 이전 역시 공포의 시대였다. 하지만 근대 이후의 공포는 좀 다르다. 계몽주의의 현자들은 과학과 근대적 기술을 통해 공포를 길들이고, 위험이 일회성에 그치도록 제어하는 삶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대의 공포는 가장 무서운 형태의 공포로 우리를 엄습한다. 그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모든 가능성 사이로 빠져나간 액체 같은 공포다. 그래서 그것은 불분명하고, 위치가 불확정하며, 형태가 불확실하고, 포착이 불가능하며, 이리저리 유동하며, 종적도 원인도 불가해하다. 바우만은 말한다. "그 어떤 위험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여겨졌던 위험만큼 악랄하지 않다"(32)고.

 

문명은 부서지기 쉬운 것이라는 선언 뒤로 바우만은 인류가 태어난 이래로 인간을 괴롭혀온 여러 종류의 공포에 대해 인간이 어떻게 대응해왔는지, 하지만 그 공포가 근대 이후 어떤 식으로 더 위험한 것이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첫 번째가 죽음의 공포다. 인류는 죽음의 공포를 꽤나 성공적으로 다루어온 듯하다. 그 첫번째 시도가 죽음의 최종성을 부정하는 것. 삶은 다른 세계에서 계속된다는 것은 종교적 구원개념과 결합해 인간에게 위안을 주었다. 두번째 시도는 주의를 죽음 자체에서 죽음의 원인-전염병, 공해, 자연재해, 기후 변화, 간접흡연처럼 사람의 의지와는 무관한 죽음의 원인들-으로 돌리는 것이다. 셋째는 은유적 예행연습을 통해 죽음의 진실을 희석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죽음이 문제가 되는 것은 2인칭의 죽음뿐이다. 나의 죽음은 나에 의해 관찰될 수도 이해될 수도 없고, 3인칭의 죽음은 우리의 어떤 상실과도 결부되지 않기에 추상적일 뿐이다. '당신'의 육체적 죽음은 '너와 나라는 세계'의 종말이며 이것은 죽음이 삶에 접촉하는 유일한 방식으로 한번 걸러낸 죽음의 경험이 된다. 또한 사람 사이의 관계의 종말로서 두 번 걸러낸 죽음의 경험이 된다. 두 번 걸러낸 죽음의 경험, 이 대리 과정을 통해 평범화되고, 이 경험이 무수히 되풀이되고 반복되면서 우리 삶의 과정에서 죽음의 경험을 격리시킨다.(78-79) 이것이 죽음의 공포를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죽음의 불가피성을 유일하게 인지한 채 살아가는 인간에게 죽음은 여전히 원초적 공포로 남아 있을 뿐이다.

 

두번째는 악의 공포. 악의 공포의 장이 내겐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그 공포가 가장 내게 가까운 것이라 실감되었기 때문이다. 유사 이래 철학자도, 과학자도 악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다만 악의 존재, 그 자체를 천명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과거에는 악을 죄를 짓는 행위로 촉발된 문제, 즉, 도덕의 문제로 보았다. 하지만 1755년 리스본을 페허로 만든 일련의 지진, 화재, 해일(이 리스본의 자연재해가 신이 선한 의지로 만들어낸 세계, 결국 그렇게 구현될 세계라는 근대 이전의 세계관을 조롱한 '깡디드'를 탄생케 했다)과 나치의 출현으로 인해 이런 인식은 끝장났다. 수잔 니먼은 이렇게 말한다. "리스본은 세계가 인간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아우슈비츠는 인간이 다른 인간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리스본이 전통적인 변신론(辯神論:'착한 사람이 불운을 겪는 일' 등 불가해하거나 사악해보이는 '신의 결정'이 사실은 선한 동기를 띠고 있다고 신을 변호하는 논리)이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확인시켜주었다면, 아우슈비츠는 그 변신론을 대신한 것도 하나같이 절망적임을 확인시켜 주었다."(103) 자연재해는 그렇다 치고, 아우슈비츠는 근대 악의 공포가 얼마나 광범위하며 일상적인가를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통해 깨닫게 했다. 악의 없이 악을 행할 수도 있다, 게다가 그 악을 행하는 자는 도구적 이성의 가장 능숙한 활용자다. 근대 관료제가 그 대표적인 예다.

 

존 사비니와 매리 실버는 말한다. "...대학살을 수행하는 데 성난 군중의 린치는 믿을 수 없다.... 완전하고 확실한 살인행위는 성난 군중이 아니라 냉정한 관료제를 요구한다. 집단적 분노보다 권위에 대한 복종심을 필요로 한다."(107) 근대가 자연이 가져온 무차별적인 몰인정함과 잔혹함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긴 여정을 걸어온 끝에 도달한 곳은 인간 스스로가 만든 잔혹하고 몰인정하고 무차별적이고 예측 불가능, 예방 불가능한 악이었다. 게다가 "그런 악은 "오직 뒤돌아보며 지나간 일을 곱씹어볼 때만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그 전에는 부지불식간에 악은 힘을 키운다. 그리고 침투해온다."(109) 그럼, 그런 악이 출현하기까지 이성은 뭘했나. 바우만은 지적한다. "근대적 이성은 독점을 형성하고 권리의 배타성을 확보하는 데 특히 발 빠르게 움직"(111)였다고. 이성은 안전이나 행복이 인류의 보편적인 소유물이 될 거라 생각했지만 천만에 말씀. 근대적 이성은 보편성보다 특권을 위해 봉사해온 것이다. 우위를 차지하려는 욕망, 그리고 우위를 지키려는 목표가 근대적 이성을 발휘하게 한 주된 동기였기 때문이다.(그리고 그런 동기가 근대적 이성을 가장 잘 작동하게 만들었다) 이런 악의 공포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부분은 바로 신뢰성 위기다. 지금 각자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사실은 악의 예비군단이라는 것. 그에 따라 "인간관계는 더 이상 믿음과 평안과 영적인 충족을 주지 못한다. 그 대신 끝없는 불안을 양산해낸다."(119) 유동적 근대에 우리가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관계를 갈망하며, 파트너쉽 대신 네트워크를 지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질적인 결핍을 양적으로 보충하려는 것이다"(120)-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트위터'까지 진화한 일련의 소셜 네트워크를 떠올렸다!!

 

다음은 통제불가능한 것의 공포. 통제불가능하다는 것은 미지의 것을 말한다. 우리가 모르는 것. 인간의 이해를 불허하는 신비의 자연, 한때는 이성을 통해 이러한 자연의 탈주술화(막스 베버)가 가능할 거라고 믿었다. 자연은 얼마든지 교정할 수 있는 것이 되리라는 기대. 하지만 인간이 만든 기술은 발전 단계마다 더 큰 독자성과 자발성을 얻음으로서 하나의 비인간적 힘으로, 발명자인 인간에게서 자유와 자율성을 빼앗아가는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149)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작용했다. 하나의 추방의 제거 경향. 인간행동의 바람직함을 따지는 과정에서 도덕적 범주의 가치를 폄하하거나 아예 그런 범주를 평가 기준에서 삭제해버리는 경향, 두 번째는 개인들이 각자의 행동의 결과에 관해 도덕적 책임의식을 몰수 당하는 경향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기술의 주된 도구는 근대 관료제다. 관료제는 도덕적 판단이 아니라 규칙에의 복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어떤 행위에 대해 의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관료제는 목적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말은 이성이 문제 해결 과정에서 가치를 사실상 배제한다는 뜻이다. 이걸 소비시장은 도덕 관련 결정을 적당한 상품의 선택으로 번역해버린다(윤리적 소비 운동?) 이같은 기술페티시즘은 전자 네트워크를 통해 실제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도 세상을 안락하게 바꾸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우리는 삶에 대해 '나는 내 몫의 삶을 살고 있는가' 라고 끊임없이 묻는 대신 우리는 정보를 확보한, 사회적 관심사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이라는 믿음 속에서 안심할 수 있게 한다.(이 대목에서 어찌나 뜨끔했던지!!) 우리는 미지의 자연을 극복하려고 찾아 나선 길을 돌아돌아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환상 - 언젠가 알게 되겠지 - 을 잃었고, 거기다 이 두려운 상황을 피하거나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공포 하나를 더 추가하기까지 했다. 

 

다음은 세계화의 공포. 이것은 이제 알려질 만큼 알려졌다. 하지만 바우만이 문제 삼는 것은 1990년대말부터 2000년대로 이어진 경제적 붕괴에 대한 것이 아니다. 윤리의 정치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다. 그래서 먼저 안보(개인에게는 안전) 문제로 접근한다. 세계화는 하나의 국가 차원에서 보장되던 안보를 더 이상 확보해주지 않는다.  정의로도 안보를 달성할 수 없다. 지속적인 평화라는 정의의 기초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으므로. 세계화를 가져온 개방성이야말로 부정의의 최대 원천이며, 오히려 갈등과 폭력의 씨앗이다. 근대적 합리성은 '리스크' 관리라는 것을 통해 예측할 수 없는 위험, 공포로부터 달아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리스크는 "서로 유사한 인과적 연쇄사건이 꾸준히 늘어남으로써 확률의 편차가 꾸준이 0에 가까워질 수 있는 조건의 세계다"(165) 하지만 부정적으로 세계화된 현대 세계는 어떤 행동의 효과가 너무 빠르게 확산되어 정규화된 통제의 범위를 벗어나버리고, 행동을 합리화하는데 설계하는 데 필요한 지식의 범위마저 벗어나버린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공포는 불규칙한 조건에서 발생하는 계산 불가능한 위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그 근원은 정치적이며 윤리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한스 요나스는 '책임의 원칙'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단다. "우리가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할 영역이 매우 빨리 확장되고 있기 때문에, 윤리학적 상상력이 미처 따라잡지 못했고 지금도 여전히 따라잡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도덕적 상상력은 역사적으로 공간적, 시간적으로 근접한 범위 안에 있는 타자들만, 즉 보고 만질 수 있는 대상만을 고려하게끔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다"(166) 장 프레르 뒤피의 말을 인용해보자. "고의적인 개인 행동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것과 '부유한 나라의 이기적인 시민들이 자신들의 웰빙에만 전념하며 다른 사람들이 굶어죽어가는 것을 방치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갈수록 줄어들고, 갈수록 변명이 안된다"(167)

 

공간과 거리 감각을 줄이는 기술이 발달할수록 우리가 고려해야 할 절대적 타자는 점점 불투명해진다. 그래서 "우리의 행동 수단과 자원이 성장할수록, 그리하여 더 먼 시, 공간까지 뻗어나갈 수 있게 될수록, 우리의 공포는 성장한다"(168) 윤리는 그렇다 치고, 그럼 정치는? 바우만은 테러와의 전쟁에 눈을 돌린다. 나노 테크놀로지의 특성처럼 유동적으로 구성되고 응집 포인트가 빠르게 이동하는 각개 테러. 테러집단이라는 실체는 사실 없다. 하지만 국경없는 텔레비전, 인터넷 같은 네트워크가 그들의 실제 능력을 넘어 위협이 어디서나 도사리고 있다고 느끼게 할 뿐이다. 바우만은 이러한 테러에 대한 지금과 같은 형태의 폭력 대응은 근본적 해결책 시행을 방해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일갈한다. 문제는 '정치의 종교화' "오직 하나의 진리, 하나의 길, 하나의 생활방식만이 존재한다는 사고, 오만하고 시비걸기 잘하는 확신과 자신감, 명확성과 순수성, 의심과 주저에서 해방된 믿음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최후의 안식처... 무한한 자기 긍정, 한 점 흠 없는 양심, 실수를 손톱만치도 걱정하지 않고 항상 옳은 쪽에 서 있다고 믿는 것."(186) 이것은 모두 종교화의 징후이고, 이것은 전지구적 경향이다. 이런 상황에서 글로벌 공포가 개별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 민주주의와 자유와 같은 가치는 이제 더 이상 한 나라나, 몇몇 나라의 차원에서만 보장될 수 없다. 그렇다면 유동적 공포의 실체는 무엇일까. 이 현대의 유동적 공포의 근원은 어디일까.

 

전근대 사회에서 인간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은 모두 세 가지다. 하나는 자연의 막강하고 에측할 수 없는 힘, 둘째는 인간 육체의 절망적인 취약성. 이 두 가지는 기술의 진보를 통해 어느 정도 해소했다. 하지만 문제는 세번째. 사람들 사이의 악의와 적대는 나아지는커녕 더 나빠지고 있다. "근대의 여러 불안이 대부분 인간의 악행과 인간 악당에 대한 두려움을 위주로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특정한 개인 또는 집단 혹은 부류가 내게 악의를 갖고 있다는 의심이 그 핵심이며, 그것은 종종 어떤 동료의 성의와 진실성을 믿기를 거부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 거부의 뒤에 거의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은 확고하고 지속적이며 신뢰할 수 없는 인간관계 형성을 일체 시도하지 않으려는 태도다."(216-217) 이런 상황의 근본적 책임을 사람들은 근대의 개인주의화에 있다고 보았다. 모든 인간은 이기적인 동기에 따라 움직이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사회를 더 나아지게 만든다는 근대적 사고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내놓도록 권고 받고 훈련 받은 정도의 진실성 없는 동정과 협동심, 그 이상을 주변 사람들에게 기대하지 않게"(217) 만들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인간 동료를 실존적 불안의 원천으로 보고, 사회를 덫과 매복으로 가득찬 적지로 보게 된다. 위험에 대한 공포보다 그것이 얼마나 커지느냐, 무엇으로 변하느냐가 중요하다. 위험에 대한 조짐을 실재로 만드는 것은 불안에 대처하는 우리의 반응-경호원 고용, 방탄차량, 총의 소지...-이다. 공포의 자극이 또 다른 공포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메커니즘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그러니까, 공포를 만들어내는 에너지는 인간의 '실존적 전율'인 거다. 더 방어적이 될수록 공포의 자체 발전 능력은 점점 더 커진다. 글로벌화하는 공포 속에서 사회가, 혹은 국가가 우리의 안보,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자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 필수생존의 공급처로서 시장에 기대게 된다. 사회권은 무너지고 복지국가의 꿈은 실패했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문제의 개인화'를 가져와 궁극적으로 더 심각한 불확실성이 찾아온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복지사회는 유혹적인 시장 상품에 비해 따분하고 단순하다. "선택이 가져오는 의외성과 모험성은 그것이 아무리 불편한, 때로는 견딜 수 없는 불확실성을 동반한다 하더라도 자극적이다"(223) 그래서 사람들은 의료를 민영화하고, 교육을 시장에 맡긴다. 우리 자신의 안전이 우리의 선택 문제가 되자 공포는 원천에서 분리되어 유동하고 확산하며 제대로 정의되지 않고 초점이 맞춰지지 않은 상태로 계속 남아 떠돈다. 모든 거대  관념이 신뢰를 잃어버린 지금, 환상의 적에 대한 공포야말로 정치인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유일한 카드다. 이것은 개인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을 위협하는 개별 범죄의 위험에 대한 강조로 나타난다. 테러 공격에 대한 경고 역시 마찬가지다. 이 두 가지가 낳은 것은 개인 자유에 가해지는 새로운 한계들이다. 대테러 전쟁이 선포된 이래 공포는 급증했고, 그에 따른 각종 엄폐물은 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가치를 침식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자본으로 한다... (그리고) 복지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자신감을,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나라 전체의 공동재산으로 부여했다"(250) 그러나 개인 안전 국가는 이같은 자신감과 신뢰의 숙적인 공포와 불확실성을 자본으로 한다. 근대 민주주의의 가치는 황혼을 맞았다. 미하일 바흐친도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지상의 권력이 갖는 구성적 순간은 폭력, 억압, 허위, 그리고 피지배자의 불안과 공포라고. 여기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두 동맹군이 있으니, 그것은 다국적 자본과 신자유주의자로 불리는 글로벌 엘리트. 그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어디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에만 복무할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마지막 장에서 바우만은 역사적 행위자에 대해 말한다. 근대 이전 마키아벨리는 역사적 해방의 책임자로 권력자를 의지했고, 그 이후에는 민중에게(마르크스), 레닌은 지식인에게. 하지만 역사는 이렇게 믿었던 역사적 행위자들을 해체해왔다. 그러면 이제 없는가. 바우만은 지식인과 민중의 결합을 이야기한다.지식인과 민중의 결합을 통해 두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하나는 자유와 안보 사이의 수용 가능한 균형을 만들어낼 희망과 기회. 다른 하나는 과거로부터 시급히 구해낼 희망으로써 칸트의 '병속의 편지'(지식인 문제).  누구든 가치 있는 메시지를 적어 병에 넣어 바다에 띄운다. 그것이 발견되어 읽힐 시점에도 메시지는 가치를 지니고 있을 거라는 전제하에 미래의 누군가가 그것을 이해하고 연구하고 적용하길 기대하는 것이 바로 병속의 편지다. 바우만은 말한다. "병속의 편지는 영원한 가치를 믿는 사람, 보편적인 진리를 믿는 사람, 지금 진리를 찾고 가치를 지키려 애쓰게 만드는 우려가 계속되리라 의심하는 사람이 쓸 수 있는 편법이다. 그 병속의 메시지는 좌절이란 일시적일 뿐임을, 그리고 희망은 계속될 수 있음을 입증하고, 가능성의 패배하지 않음과 그런 가능성을 가로막는 적들의 허약함을 증명하는 것이다."(2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