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읽은 책 이야기

양화 2010. 1. 4. 17:42

'관심사가 널을 뛰고 세상사에 오지랖이 넓은' 내가 공부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미술사', 라고 떠들고 다닌 지가 생각해보니 꽤 됐다. 한 10년 됐으려나.. 살며시 고백해보자면, 이 꿈은 순전히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에서 출발한 것이다. 조악한 흑백 도판이 실려 있던 새길 판 '미학 오디세이'를 처음 읽은 때가 대학교 1학년 때던가, 2학년 때던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하여튼, 그 책을 읽은 경험은 그동안의 독서경험과 공부에 대한 생각에 큰 충격을 줬다. 마그리트나 에셔의 그림 속에서 온갖 수수께끼 같은 것이 쏟아져 나오고 그걸 이런 저런 전거들을 들어가며 분석해서 그럴 듯하게 해석하는 게 마술 같기도 하고 꼭 추리소설 같기도 했다. 그 충격의 정체가 뭐였나, 생각해보면 그때까지 내가 생각하는 공부라는 건 선생님과 책이 어떤 진리(혹은 진리라고 생각되는 것)를 가르쳐주면 그걸 열심히 암기하거나 이해해서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아는지 모르는지 물어보는 질문에 바른 답을 하는 것이 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학 오디세이'는  공부라는 건, 그렇게 배운 것들에 자기 나름의 질문을 던지는 것, 음험한 의문을 품어보는 것임을 가르쳐주었는데, 감히 선생님이 가르쳐준 것이나 책에 나온 것에 토를 달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경험이었다. 지금에야 원래 공부란 그런 것이고, 그게 미술사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원체험의 힘은 워낙 강력해서 아직도 미술사가 무슨 유일무이한 학문의 대명사인양 미술사 타령을 하고 있는 거다. 순진한 건지, 무식한 건지.. 나도 참!

 

그후 진중권이 쓴 미술사 책은 빠짐없이 사 보았는데(충성!! ^^), 최근 나온 '교수대 위의 까치'라고 예외일까. 오히려 오랜만에 쓴 미술 주제 책이라 더 반가워서 애들 책 주문을 핑계로 미국까지 책 배달을 시킨 것이다. 곁눈질만 하고 있다가 방학을 맞아 읽기 시작했는데, 어찌나 재미있는지 책이 짧은 게 너무 아쉬웠다. 이 책에서 진중권은 자신에게 '푼크툼'으로서 말을 걸어온 12점의 작품을 창조적으로 독해하고 있다. 소개된 그림은 프라 안젤리코의 '조롱 당하는 그리스도'부터 알브레히트 뒤러의 '책을 삼키는 사도 요한', 렘브란트의 '벨사살의 연회',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우석의 제거', 피터르 브뤼헐의 '교수대 위의 까치', 조반니 프란체스코 카로토의 '그림을 든 빨간 머리 소년', 요하네스 굼프의 '자화상', 코르넬리스 노르베르투스 기스브레히츠의 '뒤집어진 캔버스', 티치아노 베첼리의 '신중함의 알레고리', 조르조네의 '폭풍우', 파르미자니노의 '목이 긴 성모', 프란시스코 고야의 '개'다. 그림 하나 하나 모두 독특한 아우라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각각의 그림이 속삭이는 이야기에 귀기울이며 시대와 화가와 심리와 역사를 종횡무진하는 솜씨가 참.. 그 가운데서도 이런 글을 만나면 나는 또 아아,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다.

 

"... 랍비문학이 이렇게 정확하지 않은 사실로 벨사살의 얘기를 윤색하는 것은, 물론 구약의 예언이 옳았음을 강변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예언은 미래의 일을 말한다 하나, 모든 예언은 실은 과거를 말할 뿐이다. 예언이란 이렇게 나중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 정당화되는 어떤 것이다.... 이민족의 손에 포로로 잡혔다가 이민족의 손에 해방이 되었다는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거대 제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던 어느 역사적 민족의 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자신들의 현실적 무력함을 여호와라는 가상적 존재의 전능함으로 보상받는 게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들에게는 그토록 절실하고 집요하게 신학적 환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벨사살의 궁전에 나타난 신의 손가락은,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신의 약속을 끝까지 믿을 수밖에 없는 한 역사적 민족의 집단적 염원이 빚어낸 강렬한 시각적 환상이었을 것이다."                                                                         P. 78-79

 

또 이런 말..

 

"이 작품에서 새로운 점은, 여기서 자화상이라는 장르가 '화가의 자의식'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회화의 자의식'을 탐구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는 점이다. 굼프는 관객에게 등을 돌려 얼굴을 감추어버리고는 화폭 위에 거울에 비친 '영상'과 캔버스에 그려진 '모상'만 남겨둔다. 그 결과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뒷전으로 밀려나고, 자연스레 그것을 그리는(또는 거울에 비추는) '행위'만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 이런 식으로 굼프는 자화상을 이용해 '주체의 본성'이 아니라 '재현의 본성'을 주제화하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굼프는 '화가의 정체성'을 묻고 있지 않다. 그가 묻고 있는 것은 '회화의 정체성'이다."                   p. 143-144

 

무엇보다 이런 것들의 매력은 이것도 그저, 하나의 해석일 뿐이라는 점에서 더 빛난다. 아직 도상적 전통이 남아있는 16-18세기 회화 언저리를 헤매다 전통 회화가 사라지고 아예 회화라는 미디어 자체가 변화를 겪고 있는 현대 미술을 한국과 서양 무대를 오가며 살핀 임근준의 '이것이 현대적 미술'을 읽었는데, 이것도 참 재밌다. 컨템퍼러리 미술의 현주소를 특정 화가들의 간략한 작품 세계를 통해 보여주는 이 책은 현대 미술의 주요 개념을 화가들의 작품 세계를 통해 가르쳐주고 있어 현대 미술을 이해하는 폭넓은 틀을 제공한다. 이 책을 읽다가 박장대소한 대목.. 1966년 일본의 전후 아방가르드 미술에 하나의 사건이 되었던 하이레드센터(참여한 세 젊은 작가의 앞 이름자를 따 붙인 이름이란다 - 高-赤-中) 얘기다. 이들은 캔버스와 의자 따위를 포장지와 밧줄로 결박한 채 작품으로 전시하거나 온몸을 빨래집게로 집어놓고 '예술 테스트'라고 우기는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키곤 했다. 이들은 바로 전 세대가 던진 '오늘날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것도 저것도 예술이 아니다'라는 대답을 던지고 있었던 셈.. 그런데 그들이 천엔짜리 지폐를 인쇄하는 바람에 위조지폐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 자신이 행한 일이 '예술'이 아니라면 결국 '범죄'가 돼 유죄 판결을 받을 판이었다. 그러므로 작가는 여태까지의 주장을 180도 뒤집어, '이것도 예술이고 저것도 예술이다'라는 논리를 폈다... 하이레드센터 일당은 퍼포먼스의 대가인 히지카타 타츠미의 제자를 데려다가 온몸을 빨래집게로 집어놓고는 '현대예술을 설명하는 증거물'로 제시했다. 한 시간 넘도록 진행된 "이것도 예술이고 저것도 예술이다"라는 요지의 진지한 호들갑이 끝을 맺고, 변호인과 피고인이 자리로 돌아갔다. 문제는 예술품으로 법정을 서성거리던 빨래집게 청년.

재판장이 "이제 당신의 역할은 끝났으니, 제자리로 돌아가 주십시오"라고 말하자, 작품은 이렇게 되물었다. "저, 저는 어디로 돌아가야 합니까?" 재판장은 말문이 막혔다. 청년이 방청석으로 돌아가면 작품이 아니라는 말이고, 작품이라면 변호인석 뒤편에 증거품들과 함께 보관돼야 했다."       p. 67-69

 

하하하... 이들 외에도 수많은 작가와 그들 작품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한 특정 시대를 산 작가가 지극히 개인적의 경험과 판단과 사상을 근거로 작품을 만들고 평론가나 감상자들에게 해설되고 감상됨으로써 보편성에 맞닿게 되는 과정 자체가 그대로 현대 미술의 한 부분처럼 느껴진다.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고, 배울 것도 많은 독서였다. 현대 미술이라면 고개부터 갸웃거렸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현대 미술에 대해 더 깊이 있는 책들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독서일기류의 책들을 좋아하는 편이라 되도록 빠뜨리지 않으려고 하는데, '닉 혼비의 런던 스타일 책읽기'를 읽고 나서는 좀 골라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일단 시작한 책을 중간에 그만두는 걸 싫어하는 나로서는 끝까지 읽기가 버거워 읽는 내내 갈등을 해야만 했다. 개인의 독서일기는 사실 마음에 들기가 쉽지 않다. 그 저자의 독서 취향과 내 취향이 어느 정도 비슷해야 하고, 그가 다루고 있는 책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는 있어야 하고... 기타 등등. 하지만 이 책은 중간중간 문장들이 너무 낯설어서 걸림돌이 된 경우다. 한국말과 글 좀 덜 봤다고 이렇게까지 이해가 안 될 수가 있나, 큰 일이네, 아닌가, 내가 너무 늙어서 그런가, 번역자의 문제일까, 아님 영국식 유머가 내게 안 먹히나, 막 이러면서 괴로워했다. 볼테르의 '캉디드'와 션 윌시의 '오, 그 모든 것의 영광이여' 두 권을 살짝 비교하며 쓴 글 가운데, 션 윌시의 책에 "18세기 프랑스 학자들의 잘난 체를 비웃을 필요가 한 번도 없습니다"라는 말을 광고문으로 붙여야 한다고 했는데, 이 문장만 정확하게 열네 번을 읽었다. 그런데도 끝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줄거리도 모르는 책에 대한 간단한 비평으로 이루어진 책은 보기가 참 어렵다. 물론 그래, 맞아 무릎을 치며 낄낄거리고 읽은 부분도 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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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 아닌 걸 쓰는 것도 무척 더디고 힘들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암튼 새해다. 1월 1일이 되는 날에도 실감을 못하고 있었는데, 내일 애들이랑 나랑 개학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비로소 새해 같다. 올해는 무슨 일이 있을까. 매해 이런 걸 저런 걸 해보자, 자잘한 계획을 세워보았는데, 올해는 그저 공부나 힘들지 않게 해달라고 아무한테라도 빌어야겠다. 그새 힘들었던 건 다 까먹었는지 지나고 보니 어려운 게 배울 게 많았다 싶은 생각이 든다. 아직 진짜 고생을 못한 모양이다. 무엇보다 올해, 나와 아이들이 건강하길... 바라며 운동 계획 하나만 마음에 다부지게 품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