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러갔다

렛 미 인 - 비극의 순환

양화 2008. 11. 24. 18:36

 

 

영화를 보고 나서, 기억 속에 남은 것은 그것 뿐이었다. 마치 아버지처럼 이엘리를 돌보고 있던 그 중년 남자의 마지막 얼굴.. 그는 이엘리에게 일용할 양식인 피를 가져다 주기 위해 등산 같은 건전한 취미생활을 즐기는 사람이 이른 일요일 아침 장비를 챙기듯 칼이며 피를 담을 통 등을 성능을 시험해가며 서류가방 같은 곳에 차곡차곡 담았다. 그가 사람을 죽이고 피를 뽑아오는 일은 마치 가끔은 조금 짜릿하지만 약간은 지겨운, 하지만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직장 생활 같았다. 지나다니는 이가 드문 숲 속 길, 하얀 자작나무가 나란히 서 있는 눈 덮인 그곳에 건장한 청년을 거꾸로 매달고 섬세하게 목의 핏줄을 끊고 그걸 플라스틱 통에 받치는 일련의 과정은 몇 년 동안 잘 갈고 닦은 숙련공의 손길처럼 일상적이고 질서정연하다.

 

 

희생물을 구하기 위해 남자 고등학교에 스며든 그는 친구들 뒤로 좀 처져 있던 한 아이를 기절시키고 막 매단 참이었다. 갑작스런 소등에 이어, 늦는 친구를 찾기 위해 돌아온 친구들, 지연된 시간 때문에 마취제의 약발이 떨어져 깨어난 아이... 그는 당황하는 바람에 엎질러서 겨우 반이 남은 누런 액체가 담긴 병을 들고 불 켜진 옆 욕실로 기어들어간다. 살려달라 외치는 아이와 어떻게든 잠긴 문을 열어보려고 문밖에서 쿵쿵거리는 아이들.. 그런데, 그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그의 얼굴은 그저 피로하기만 하다. 그는 그 얼굴 위로 가져온 누런 액체를 쏟아붓는다.

 

피를 구하러 나간 남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이엘리는 병원으로 찾아간다. 창문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들어가도 되냐고 묻는 이엘리에게로 남자는 불편한 몸을 끌고 느릿느릿 걸어온다. 창문을 여는 그. 그는 아무 말없이 자신의 상반신을 창문 밖으로 내밀고 이엘리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목에 송곳니를 꽂는다. 부감 화면으로 잡힌 그 화면 속 남자의 얼굴은 한 쪽이 녹아내려 있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엔 깊은 동굴 같은 어둠이 있을 뿐이다. 아무 감정이 없는 것처럼 텅 비어 있는 듯한 얼굴, 다음 순간 남자의 몸이 창문 너머로 떨어진다. 영화 전체를 통해 그 얼굴이 지워지질 않았다.

 

12살 소년이 꿈꿀 법한 죄책감이 스며든 두려움과 설렘이 이 영화가 그리는 첫사랑의 근경이라면 그 얼굴은 그 사랑이 도달하게 될 사랑의 원경처럼 보였다. 영화의 첫 장면, 그 남자는 한밤중 조용한 주택가에 도착한 택시에서 내리고 있었다. 그때 그의 좀 피곤하고 심드렁하지만 해야 할 일을 남겨둔 사람의 조바심과 자부심 섞인 얼굴 위에, 맨 마지막 장면에 나온, 조용히 달그락 거리는 기차 한 켠에 앉아 이엘리를 숨겨둔 커다란 가방을 끼고 어디론가 떠나는 오스칼의 아름다운 얼굴이 겹쳐졌다. 그리고 그 위에 텅빈 어둠 같던 그 남자의 얼굴도 겹쳐졌다. 뱀파이어에 드리운 매혹은 첫사랑의 환상처럼 영원하지만 사랑은 인간처럼 쉬 늙는다.

 

영화를 다 보고 집에 오는 동안, 기차를 타고 어느 조용한 마을에 도착한 오스칼을 생각했다. 살기 위해 사람의 피를 먹어야 하는 이엘리를 위해 그 남자처럼 장비를 챙겨드는 오스칼. 흰 우유를 가득 채운 유리잔과 붉은 피를 가득 채운 유리잔의 대비는 황홀하지만 그걸 나눠 마실 수 없다는 걸 아마 곧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는 시간이 지날수록 피로감이 짙어지고 무표정해지는 얼굴이,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느끼는 때가 왔을 때 자신에게 남은 것을 이엘리에게 주는 그 공허한 마지막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면 다시 은밀한 두려움을 안은 채 속절없이 첫사랑에 빠져버릴 열두 살 소년이 나타나겠지. 이 영화를 본 그날 밤, 한쪽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내다 보면 검은 하늘에 고요히 눈에 내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창문에 가만히 손을 대보게 될 것이다.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 소리를 비우고 잡스런 물건들을 치운 자리마다 고요와 공포와 신비, 절대적 아름다움을 대신 채워둔 그 장면들을 아마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첫사랑의 기억처럼 문득문득 떠오를 것이다. 감각은 학습되어 기억속에 있지만 겪을 때마다 새롭다. 그러니 인간의 어리석음은 숙명일 수밖에. 하지만 그래서 더더욱 연약하고 아름다울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