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시비
전에 서평 기자로 일할 때 들은 말인데, 아주 내 마음을 딱 찝어낸 말이라 오래 기억에 남았다. 미국의 유명 서평 기자가 한 말이라는데, 작가와 글과 기자 사이의 관계에 따른 서평 쓰기의 곤란함의 정도랄까. 우선, 서평을 부담없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조건은 기자가 작가를 모르는데, 작품이 무지하게 좋은 경우, 두번째로 좋은 조건은 작가를 잘 아는데, 글도 잘 쓴 경우(이럴 땐 꼭 '다행히'라는 말을 붙여줘야 한다), 그 다음은 작가를 모르는데, 작품이 별로인 경우, 최악의 경우가 바로 작가를 잘 아는데 작품이 되게 별로인 경우란다. 중간의 두 경우에 대해서는 어떤 게 더 앞에 놓이는 건지 조금 헷갈리기도 하는데, 하여튼 제일 쓰기 좋은 경우와 제일 쓰기 나쁜 경우는 확실하다.
편집자가 되고 나서도 비슷한 고민을 한다. 작가와 글과 편집자의 관계와 좋은 책의 상관관계에 대해 말이다. 편집자가 되는 사람 가운데, 그동안 존경해 마지 않던 필자들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것, 그들의 책을 내가 만든다는 것이 자극이 되기도 하겠지만 정작 편집자가 되고 나면, 독자로서 누릴 수 있었던 그런 설렘 따위는 금세 사라져 버린다. 어쨌든 일이니까. 서평 기자의 딜레마에 비추어 보면, 편집자가 가장 일하기 좋은 경우는 물론 작가는 잘 모르는 사람인데, 글이 아주 좋은 경우다. 가장 나쁜 경우는 작가를 잘 알고 관계도 좋은데 글이 별로인 경우다. 여기에 취향이 섞이면 좀 더 복잡한 상황이 된다. 예를 들면, 객관적으로 글이 나쁘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도 좀 곤란한 상황인 거다.
하지만 서평 기자와 편집자와는 결정적 차이가 있으니, 바로 작가와 책과 맺게 되는 관계의 밀도다. 서평 기자의 경우도 각별한 애정을 나눈 저자가 있는 경우가 있겠지만 편집자의 경우, 기획에서부터 저자 미팅, 글이 들어와서 그걸 조율하는 과정 내내 서로 긴밀하게 의견을 나눠야 하니까 아무래도 관계의 밀도가 다르다. 그 밀도가 사랑으로 승화되면 더 좋겠지만 저자를 끝끝내 사랑할 수 없게 되더라도 책이 나온 다음에도 계속 협력해야 하고, 책은 어쨌든 내가 주물러 만든 책이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니까 그런 책이 서점에 나가고 서평 기자들 손에 건너가면 우선은 좀 사랑 받았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인지상정이다.
독자나 기자들에게 들려진 책의 첫 반응이 돌아올 때가 편집자로서는 아주 가슴 떨리는 순간이다. 진심을 담은 호평이라면 더할 나위 없고, 적어도 책의 면모를 정확하게 파악한 평은 정말 고맙고 뿌듯하다. 책을 어떻게 읽든 그건 전적으로 독자의 마음과 취향에 달린 거니까 그에 대해 편집자나 저자가 왈가왈부하는 건 굉장히 촌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평, 혹은 악평을 맞닥뜨리면 여러 가지 면에서 가슴이 떨려온다. 세계적인 걸작이라도 개인의 호오에 따라 졸작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니 평 자체에 시비를 걸거나 공권력(?)을 행사하는 건 정말 웃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끔, 어떤 평은 그저 험하게 말하고 싶어서 쓴 것일 뿐이로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평을 만나는데, 그러면 마음은 참으로 쓸쓸해진다.
최근 내가 일하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 한 권을 둘러싸고 극과 극의 평이 오가면서 조금 시끄러웠다.(내가 만든 책은 아니다) 남 칭찬하는 게 남의 뒷담화 하는 거보다 재미 없는 건 사실이지만 애초에 자기 취향의 책(특히 에세이의 경우)이 아니란 사실을 잘 알면서도 굳이 (나쁜 소리 하려고) 읽고 평까지 쓰는 걸 편집자 입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다. 특히 힘든 악평은 다 읽은 후에 그래, 만들면서는 몰랐는데 이렇게도 읽을 수 있겠네, 혹은 내가 만든 책이지만 이런 점은 정말 아쉽네 라고 수긍하게 하는 대신 그 책을 좋게 읽은 다른 사람까지 덩달아 쓰레기 혹은 바보가 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거다. 책을 읽고 나서 나도 숱하게 이런 책을 돈 주고 사다니.. 해 본적은 많지만 그래도 같은 책이 누군가에게는 감동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부정해본 적은 없다.
아주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긴 하지만 그렇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어떤 책을 좋아한다거나 눈귀 다 가리고 절대적으로 옹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 취향의 책이 아닐 경우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 책이라고 대내외적으로 떠들고 다니는 편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작가를 아는데, 그 책을 좋아하지 않는 경우다. 하지만 그뿐이다. 내 취향의 책이 아니니 읽지 않거나 읽더라도 그저 대강 읽고 말 뿐, 그 책을 꼼꼼히 보는 시간을 절약해 내가 좋아하는 다른 책을 읽는 것이 그 책을 좋게 읽을 다른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 예의를 갖추는 거라고 생각한다. 읽지 않아도 주변 정보를 통해 내 취향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데, 굳이 그 책을 읽고 평까지 쓰는 건 다른 의도가 있어서라고밖에 볼 수 없지 않나. 휴, 그저 독자일 때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