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단점
... 바로 독서에서 비롯되는 자아 분열에 따른 광기에 대한 두려움과도 연관되어 있다. 독서는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해줌과 동시에 탈 개성화 작용을 발생시킨다. p. 87
읽지 않은 책에 관한 담론은 자기 발견의 가능성을 떠나서도, 일단은 우리를 창조적 과정 한가운데에 위치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그러한 과정의 기원으로 다시 끌고 가기 때문이다. 그런 담론은 그것을 실천하는 이에게 자기 자신과 책들의 분리가 이루어지는 최초의 순간, 즉 다른 사람들의 말의 무게에서 마침내 해방된 독자가 자기 자신의 텍스트를 만들어내며 작가가 되는 힘을 자기 안에서 찾게 되는 순간을 경험함으로써 탄생하는 창작 주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p. 231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피에르 바야르 지음
독서의 장점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예를 들어가며 이야기하고 있으나 독서에 단점이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게다가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니, 사기를 치라는 말인가. 그러나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책을 읽은 후 행해지는 이른바 비평행위의 창조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비독서의 방식들 -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경우, 책을 대충 훑어보는 경우, 다른 사람들이 하는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 책의 내용을 잊어버린 경우 / 담론의 상황들 - 사교생활에서, 선생 앞에서, 작가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 대처요령 - 부끄러워하지 말 것, 자신의 생각을 말할 것, 책을 꾸며낼 것, 자기 얘기를 할 것 등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책을 읽은 독자가 경험하는 모든 독서의 국면을 하나하나 짚어보고 있다. 재밌는 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으로서의 '책' 읽기를 독자의 입장에서 새롭게 정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테마는 한 권의 책, 혹은 한 작가, 한 가지 상황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가령, 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경우는 무질의 '특성없는 남자'라는 책을 중심으로 이야기 된다. 그 책에 등장하는 한 사서는 수백 만 권이 수장된 도서관에서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 그 비결이 무엇인지 묻는 스툼 장군에게 그는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책을 읽지 않는 대신 그는 '총체적 시각'을 갖고 있다. 그것은 지하철 노선도와 같은 소통과 연결선을 파악하는 것이지, 책의 내용 하나하나를 아는 게 아니라는 거다. 이것은 교양의 문제와도 연결되는데, "교양을 쌓았다는 것은 이런저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 전체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줄 안다는 것, 즉 그것들이 하나의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각각의 요소를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 속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내부는 외부보다 덜 중요하다. 혹은, 책의 내부는 바로 책의 외부요, 각각의 책에서 중요한 것은 나란히 있는 책들"(p. 31)이라는 거다.
책을 대충 읽기만 하고도 서슴없이 비평을 해댔던 프랑스 문학가 발레리의 연설을 차용하고 있는 대목에서는 "작품에 너무 가깝게 다가가서 그 독특함 속에 빠져 길을 잃게 될 위험"을 막기 위해 "작품에 대한 단순한 관념만을 보존하"(p. 54)려 했다고 한다. 책 얘기를 귀동냥한 경우를 설명하기 위해 끌어온 프로이트의 화면-추억을 비튼 '화면 책'이라는 개념은 아주 재밌다. 누군가에게 들은 책 이야기는 듣는 순간 자신 안의 "어떤 내면의 길을 좇아 어떤 가공의 오브제를 구축"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화제로 삼는 책은 사실 저마다의 화면 책일 뿐,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으로 설명한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화제로 삼는 대부분의 책들의 상징"(p. 76)으로서 말이다.
몽테뉴의 수상록을 주제로 이야기하고 있는 독서 후 망각은 독서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책은 마치 어떤 비개인적인 지혜의 일시적인 수탁물일 뿐, 자신의 임무를 완수한 후, 즉 자신의 메시지를 양도한 후 곧바로 사라지는 것"(p. 80)이다.
그러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 역시 때때로 이런 상황에 처하곤 하는데, 그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유명한 책들의 경우 더하다. 하지만 그것도 염려할 것 없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그 책이 모두에게 저마다 다른 책이므로.. 그걸 각자에 마음 속에 든 '내면 도서관'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도서관은 "망각된 책들과 가상의 책들 - 우리는 이 책들을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 - 의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다"(p. 107)는 거다.
내면의 도서관에서 한발 더 나아가면 "내면의 책"이 등장한다. 이건 "독자와 모든 새로운 글 사이에 개입하여 알게 모르게 독서를 가공하는 신화적이고 집단적인 비개인적 표상들 전체"(p. 118)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 부분은 아프리카의 한 종족에게 햄릿을 읽어주었을 때, 그들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해석하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풀어가는데, 결국 아프리카 한 종족의 햄릿처럼 우리도 모든 책을 자신의 내면의 책과 최대한 일치를 이루도록 변형시킨다는 거다. "이 내면의 책은 독자가 일생을 통해 추구하는 환상적 대상"이며, "독자가 생을 통해 만나게 될 최고의 책들이란 단지 책 읽기를 계속하도록 그를 자극하는 이 내면의 책의 불완전한 조각들에 불과한 것"(p. 121)이라는 통찰은 또 얼마나 신선한지..
작가를 만나는 상황이라도 마찬가지. 작가의 내면의 책과 독자들의 내면의 책이 서로 소통할 수 없다면, 그들은 같은 책을 읽고도 같은 책을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같은 책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둘은 서로의 "내면의 책이 동일하다는 환상을 주기 위해 애"(p. 148)쓰겠지만 그건 타자(他者)로서의 상대를 부인하는 일이 된다.
그러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것도 염려할 것 없다. 위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들 때문에 책은 운석이나 - 다른 별에서 날아온 - 어떤 숨겨진 자아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어떤 사람의 연장이다. 다시 말해서 홀로 고립된 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책을 말하든 그것이 무질의 사서처럼 그 책의 위치와 연결지점에 대한 총체적 시각을 가지고 있기만 하면 해결되는 문제다.
책을 통해 쌓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교양은 대부분 어림짐작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문명화된 규칙들이우리가 솔직하지 못하도록 속박하는 일종의 폭력이다. 이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게임 하나가 등장한다. 그것은 모욕게임으로 잘 알려진 책들 가운데 자신이 읽지 않은 책을 말하고 모인 사람들 가운데 그 책을 읽은 사람이 많을수록 점수가 높아지는 게임이다. 이것은 누구나 읽었을 거라고 짐작하는 책을 스스로 읽지 않았다고 고백해야 한다는 점에서 모욕게임이다. 데이빗 롯지의 책 '무대전환'에 등장하는 것이다. 교양이 어떻게 폭력일 수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 예화는 결국 영문학 교수로 하여금 '햄릿'을 읽지 않았다고 고백하게 한다. 하지만 반전은 그 교수가 햄릿을 강의해오는데, 햄릿을 읽지 않은 것이 전혀 문제가 된지 않았다는 아이러니다.
그럼 이제 무엇을 할까. 바로 "우리의 내면을 억압적으로 지배하며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을 가로 막는 것, 즉 교양있는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p. 174) 자신의 생각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 책에 대해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담론"(p. 194)의 문제이며, "책이란 영원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떤 유동적인 오브제이며 그 유동성은 책을 중심으로 짜이는 권력 관계 전체와 관련이 있음을 상기하는 것이다"(p.193)
그러므로 책에 관한 한 "비독자나 독자 모두가 그들이 원해서건 그렇지 않건 이미 책을 꾸며나가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 들어가 있으며, 그러므로 진짜 문제는 거기서 어떻게 빠져나오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 과정의 폭과 역동성을 증가시키느냐 하는 것"(p. 205)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얘기하는 책들은 가상의 어떤 완전한 독서를 통해 그 객관적 실제 내용을 되찾을 수 있는 실재하는 책들인 것만은 아니며, 각각의 책과 우리 무의식의 여러 잠재적 가능성의 교차에서 솟아오르는 '유령 책들'이기도"(p. 208) 한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로 끝을 맺자. 그는 이렇게 말한다. "반 시간 정도면 어떤 책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어렵잖게 알아낼 수 있네. 형태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파악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사실 6분이면 충분하네"(p. 220) 중요한 것은 책 자체가 아니라 담론의 순간이라는 것! "두려워해야 할 것은 텍스트에 대한 거짓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거짓이"(p. 230)라는 것!
안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 순간, 이 대목을 떠올리면 스스로 움츠러들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 역시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데, 독서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건 아니다. 다만, 자기 자신을 잃을 정도로 빠지지 말고 그저 통과해야할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