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리본의 시절
권여선 지음/창비/251면/2007
권여선의 책을 읽는 동안, 내 삶은 안전한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덤덤하고 안전하게만 보이는 그 일상이 얼마나 날카로운 칼날을 숨기고 있는지, 얼마나 기괴한 모양의 균열을 가지고 있는지 하고요. 출근을 하다가 문득 옆 차선의 저 차가 난데없이 속력을 높여 내 쪽으로 돌진하면 나는 찍소리 못하고 죽게 되겠지, 그렇게 죽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아니, 죽는 순간 머리속에는 무엇이 떠오를까. 집에 돌아가다가 갑자기 발길을 돌이켜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홀홀 떠나버린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커다란 문제가 아닐지 모릅니다.
딸과 엄마 사이에 흐르는 상식적인 유대감을 뒤집는 '가을이 오면'은 무엇보다 로라가 엄마에 대해 갖는 적대감의 모호함이 돋보입니다. 다들 느끼잖아요. 그냥 싫은 것, 그냥 견딜 수 없는 것,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지. 사실 "대상에 대한 (그런) 혐오 속에는 자신과의 깊은 유사성이 깃들어 있"죠. 권여선이 단언한 것처럼 "닮았기에 싫은 것"입니다. "모르는 것은 미워할 수조차 없으"니까요.(p.163) 권여선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그래서 하나 같이 "머릿속에 살짝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깊고 은밀한 접촉을 당한 듯 불쾌해지는 질감의 소유자들"(p. 178-179)입니다.
'본홍 리본의 시절'에서 위태위태한 관계를 그리는 네 남녀, '약콩이 끓는 동안에'에서 상식의 날카로운 가장자리에 아슬아슬 걸쳐져 있는 등장인물들, '솔숲 사이로'에서 욕망이 넘칠듯 말듯 찰랑거리고 있는 그 인물들, 무관심로 넘어가기 직전의 히스테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반죽의 형상' 속 두 친구, 일탈마저 지루해져 버린 '위험한 산책'의 남녀는 모두 그런 자들입니다. 그 최고봉은 아마 '문상'의 주인공 '우정미'겠죠.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일상의 뒷면에 괴어 부글거리는 음습한 정념과 욕망, 가시 돋친 모멸과 혐오, 죄의식과 분열"(p. 233) 같은 우리들의 어두운 심연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종의 극단적인 파국"(p. 76)을 기다리거나 "무언가 야박한 짓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p. 71)어 합니다. "원한의 표적은 정신의 추위 속에서만 생겨나는 결빙의 환각"(p. 217)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혐오하지 않고는 자기 모멸로부터 벗어날 방법이 없으니까요. 결국 "공들여 얻은 안정이란 오로지 그것을 초개와 같이 내버리는 순간을 위해서만 존재하는지도 모"(p.200)릅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이 책이 싫어졌죠? 하지만 "살 수 있을 때는 나쁘게라도 사는 게 미덕"(p. 201)이라 믿고, "이 삶에서 아무것도 버릴 수 없다"(p.250) 말하는 작가를 슬프게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에요. 그게 바로 우리니까.
'약콩이 끓는 동안'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죽은 자들이 죽은 뒤에도 얼마간 삶을 지속한다고 한 흥미로운 내용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썩었어도 죽은 자의 의식은 몇 주일이나 몇 달에 한번씩 깨어 보보끄, 보보보끄라는 말을 갑작스레 내뱉는다는 거에요. 그것이 어쩌면 삶 너머에 있는, 어쩌면 삶 내부에도 있을지 모를 처절한 무의미의 빈터라면, 우리 모두는 자기만의 보보끄를 알기 위해 지루한 삶을 끝까지 살아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상이 종종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그 심연을 들여다 보며 '보보끄' 나즈막히 말해보려고요. 물론 혼자 있을 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