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서평

안달루시아의 낙천주의자

양화 2008. 5. 9. 00:02

 

크리스 스튜어트 지음/신소희 옮김/354면/눌와/2008

 

어릴 때, 시골에서 살았습니다. 하기야 지금 그렇게 화려한 강남 한복판도 배나무 밭이었다는데, 그 시절 시골 아닌 곳이 어디였겠습니까만. 그럼에도 선뜻 시골을 제 고향이라 말하기 망설여지는 것은 저희 집의 경제적 기반이 그곳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시골에서 살긴 하되, 그곳은 그저 일시적인 거주지였을 뿐 그 땅에 대한 소속감이나 책임감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낭만만 취하면 그만이었습니다. 나이가 들어 우리를 도시에 붙들어둔 조건들이 사라지면 복잡한 도시에서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늘 스스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도 결국 책임감 없는 낭만에 근거한 것이려니 싶어서요.

 

한때 필 콜린스가 몸 담았던 그룹 제네시스의 드러머 크리스 스튜어트가 쓴 '안달루시아의 낙천주의자'는 그런 제 자신을 아주 차갑게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민망해서 천천히 읽었고, 그럼에도 킬킬거리게 만드는 그 대책없는 현실적 낙천주의에 느긋하게 읽었습니다. 환상적인 표지지만 그런 곳에서의 여유있고 산뜻한 삶을 기대한다면, 실망하실 거에요. 이건 "지긋지긋한 일상의 반복"을 떠나 "진정한 삶"을 찾았다는 류의 책이 아니라 거기서 살아가기 위해 어떤 것들을 포기하고 어떤 것을 감내해야 하는지, "그리운 고향에서 강제로 쫓겨난 피난민"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가 만나야 하는 첫 이웃은 순박한 시골 농민이 아니라 불쾌하고 사기꾼 같은 농장 주인 페드로이고, "제라늄과 오렌지꽃이 만발하고 햇빛이 찬란한 농장" 대신 "살인 뱀들이 우글거리는 계곡, 돌멩이와 전갈이 가득한 집"입니다. 아내가 도착하고 그들은 수도와 온수기와 오븐, 도로까지 지긋지긋해하며 버리려 했던 것들을 고스란히 되가져옵니다. 게다가 먹고 살기 위해 스웨덴까지 양털을 깎으러 가고, 수로를 청소하고, 채소밭을 가꾸는 일들은 지겨운 일상이 되고,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사기꾼과 고집스런 시골 사람들을 상대해야 합니다.

 

거기에 어떤 낭만도 없습니다. 도밍고는 "그는 내 친구지만 사기꾼이기도 하지요, 그가 당신을 도와줄 거에요" 라고 말하는 한편, 현실적인 가난을 대물림할 수 없어 결혼을 포기합니다. 하지만 그가 얼마나 아기를 능숙하게 잘 안는지, 아버지로서의 자질이 얼마나 뛰어난지 이야기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쓸쓸해집니다. 도시에서 자신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시골로 이주해온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그는 아닌 척하며 고자질하는 능구렁이 같습니다. 양털을 기계로 깎는 것에 반감을 드러내는 사람을 보면서 그가 가져온 '진보'가 변화시킨 현실이 과연 옳다, 그르다로 판단할 수 있는 건가 이야기합니다.

 

낭만이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신념으로 덧칠해지지 않은 그의 삶은 시골에서의 삶을 그려왔던 제게 두려움을 안겨주지만 그와 똑같은 비중으로 안심하게 합니다. 이를 테면, 이런 것입니다. 이제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가 죽은 염소에 관심을 가질 때, 그는 갈등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아빠의 염려와는 무관하게 매일 그 염소가 �어들고 여우와 새와 개들에게 뜯어먹혀 사라지는 장면을 보러 갑니다. 아이는 역겨워하지 않으면서 "생명이 사라져가는, 염소의 구체적 존재가 서서히 무(無)로 돌아가는 과정"을 지켜봅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삶은 그렇게 투명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음을 얻는 것이 좋았습니다.

 

다른 삶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는 동안 서서히 알게 될 거에요. 그 다른 삶이라는 게,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 각자의 삶은 그들이 사랑하는 만큼, 열려있는 마음만큼이라는 걸 알게 되거든요. 어디서 사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지요. 모든 삶이 우리가 기대한 것보다 항상 조금 좋다고 말하기 위해서 다른 말은 필요없어요, 이 책의 마지막 장면을 본다면. 안개가 자욱해요. 양치기 도밍고의 나귀 방울소리가 들려옵니다. 희뿌연 양떼를 이끌고 가는 나귀 보톰의 등에는 도밍고가 앉아있고 그 귀에는 도밍고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의 어깨에 기대 졸고 있는 외국에서 온 조각가 안토니아의 모습이 보입니다. 꿈결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