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데어 윌 비 블러드 - 이것이 영화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현대 사회 노인 복지의 그늘' 정도로 생각하고 온 관객들에는 어이없는 영화였을 터. 영화를 뒤덮고 있는 묵시록 같은 분위기는 계속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하고 중얼거리게 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 노인으로 상징되는 지혜와 품위는 안톤 쉬거라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에 짓눌려 있다. 이유도, 명분도, 어떤 납득될 만한 인간적인 연민 한 점 가지지 않은 그것은 운명일까, 미래일까, 비인간적인 사회제도일까. 동전의 어떤 면이 나올지, 그것이 곧 자신의 의지라고 말하는 그는 묻는다. "내가 보이나" 칸느영화제에서 한 기자가 심사위원에게 안톤 쉬거 역을 맡은 하비에르 바르뎀에게 왜 남우조연상이 안 돌아갔냐고 따지자 귀찮은 듯, "그가 내게 20달러 빚져서"라고 말했다던데... 그가 나온다는 '고야의 유령'이 보고 싶어졌다.
인천에서 제일 크다는 체인형 극장에서 하루에 딱 한 번밖에 안 해주길래, 곧 끝나겠구나 싶어 무리해서 본 영화. 이걸 보고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너무 시시해졌다. 괴물 같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 집요하고 잔인하고 뻔뻔하다. 자본주의든 종교든 그게 뭐든 그 상징의 성격이 최고로 집요하고 잔인하고 뻔뻔해야 한다면, 그것이 곧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분한 다니엘 플레인뷰라고 하면 최고의 표현이 될 것이다. 기독교 자본주의의 역사에 "피가 있을지니!" 그것이 미리 치른 댓가든, 가혹한 결과든 말이다. 다니엘 못지 않은 포스를 보여준 또 하나의 배우 폴 다노, 불안하고 음습한 이 영화의 분위기를 제대로 만들어준 라디오헤드 멤버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도 기억해두고 싶다.
두 작품이 모두 문학작품을 스크린 버전으로 만든 것이어서 여러 가지 상념이 들긴 하지만, 최후의 승자가 영화가 될지 문학이 될지는 새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데어 윌 비 블러드의 감독은 나와 동갑이라는데, 허, 참! 세월과 성취, 혹은 나이와 재능은,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지만, 무관하다.어쨌든 이런 게 바로 진짜 영화, 라고 무릎을 치게 만든 두 편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