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일기

하고 있는 일들

양화 2008. 4. 3. 17:10

출판사에 들어올 때는 사실, 아주 근엄한 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수지만 결코 배신하지 않을 튼튼한 독자군을 대상으로 시류에 상관없이 늘 적당히 팔리는 책, 그래서 적어도 10년 정도는 꾸준할 책, 이런 책들을 한 열 두 권쯤 만들면 내 연봉 정도는 간단히 커버하고도 남을 책, 그래서 봉급을 받는 데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될 책, 그러면서 이 책, 내가 만든 거거든, 하고 목에 힘 줄 수 있는 책.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나는 대중이라는, 이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괴물 같은 독자들의 관심사와 수준을 가늠하기 위해 머릿속이 정신없고, 독서시장의 트렌드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 일을 관둘 때까지 계속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지려고 한다. 내 관심과 취향이 그들과 딱딱 들어맞기만 한다면 좋으련만, 그럴 리 만무하니, 늘 독자들의 안색을 살피며 눈치를 볼 뿐이다.

 

1. 그림여행에세이

'뜻밖에 잘 그린 그림'과 아주 어쩌다 나오는 짤막한 '단상' 밖에 무기라곤 없는 책이다. 한달 동안이나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쓴 것인데, 여행지의 매력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게 이 여행기의 특징이자 난관. 아프리카에 대해 사람들이 가질 법한 이중적 매력, 그래서 독자들이 일차적으로 기대할, 위험하고 불편할 거 같아요, 그런데 괜찮나요의 매력과 원시적 생명력, 위아더월드 같은 뭔가 심오한 매력, 둘 다 거의 없다. 원고를 보충해달라고 해놓은 상태이긴 한데, 아주아주 큰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평균적인 책이 될까 싶어 여간 회의적이다. 매력이라면, 여행에 과도한 의미 - 인생을 배운다느니, 이래서 떠났다느니, 떠나보니 이렇더라 같은 도사 같은 이야기들 - 를 부여하지 않는 그냥 시간 있고 여유있어 떠난 보통 여행자의 시선 정도? 단점은 최소화, 장점은 극대화. 그러니 이 매력을 최대한 살려볼 수밖에 없겠는데... 앞으로가 문제로다.

 

2. 가벼운 사회에세이

거칠게 주제를 요약하자면, 문제가 된 연예이슈를 대하는 사회와 대중의 태도가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가 될 텐데, 문제는 그냥 저냥 사람들이 떠드는 가십을 단행본의 무게만큼 무겁게 만들 수 있을까, 책에서 이야기하는 주제들이 책을 보는 독자들에게 어떻게 공감대를 만들 수 있을까다. 자칫하면 수많은 인터넷 매체들이 나름 언론인 체 하며, 대중들이 갖고 있는 윤리 감각의 이중성이니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유교적 엄숙주의가 어떠느니 하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결과가 나오게 될 것 같다. 우선은 필자가 갖고 있는 발랄함으로 이런 구태의연함을 무찌르고, 이 문제들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을 다양한 형식으로 전하는 게 관건. 아무래도 필자 의존도가 높다. 그래도 과연, 이런 문제를 돈 주고 독자들이 사볼 만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을까가 난 여전히 의문이다.

 

3. 능력있는 매니저와 그가 거느린 연예인들

내가 이런 일을 맡게 되다니... -_-;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닐까. 연예인들 공부하느라고 죽을 맛이다. 연예인 홈페이지에서 연예인들의 일기를 꼼꼼히 찾아 읽고, 관련 기사들을 찾아 읽고 있노라면, 이거 뭐하고 있는 짓인가 싶다. 드러난 것이 많은 이들이지만 그게 대부분 포장이기 때문에 그 연예인이 도대체 뭘 잘할 수 있는지, 또 그 사람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이런 것만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게 문제. 게다가 연예인들의 어떤 책이든,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나로서는 이런 책을 많이 만든다는 것 자체가 회의적이다. 정말 들을 게 있다고 판단되는 한 두 사람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이런 책을 여러 권 만드는 것은, 글쎄. 화제가 되는 것만큼 시장 반응은 그다지 좋다고 하지 않던데. 연예인에 대해서는 포털에서 알려주는 것만큼만 알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게 진짜 대중들의 마음 아닐까, 하는 게 내 생각.

 

4. 경제 관련서

이것도 공부하느라고 죽을 맛. 저자가 이 바닥에서 꽤 알려져있지만 알려진 것에 비해 출판시장에선 신인이라 앞으로 좋은 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게 최대 장점.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피부 경제와는 거리가 먼 거시 경제를 이야기하는 사람이고 그동안 해온 작업도 자료 차원의 데이터가 많아 (미적분도 나온다!!) 이 데이터들을 어떻게 대중적 눈높이로 요리할까가 관건. 다행히 이 필자와 그의 작업에 대한 이해가 높은 기자 출신 조력자가 있어서 잘 조율해나가면 될 것 같은데... 샘플이 될 만한 글이 없어 어떤 형태의 책이 될지 아직도 감이 없다. 그동안 해온 작업들을 거시 경제 카테고리 - 경제성장/물가안정/완전고용 - 로 나눠 자리잡기를 하고 있는데, 이 엄청난 각각의 문제들과 연결될 경제 뉴스들을 찾아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 일이 가장 힘든 일이자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인 듯.

 

아니, 이런 일들을 한 사람이 다 한다는 건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한 사람이 다루는 일치고는 너무 일관되지 못하다. 게다가 도무지 어느 것 하나도 나와 맞아보이거나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일이 없다. 그래서 시작부터 막 자신이 없어지고, 벌써부터 좋은 결과가 안 나오면 그 자책감을 어쩔 건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일종의 훈련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지는데, 어쨌든 무지하게 힘든 훈련인 것만은 틀림없다. 매주 고전작품을 하나씩 읽고 라디오 원고를 쓰는 일까지 해야 하니, 주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