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미안하다, 진심으로

양화 2007. 12. 26. 17:41

원래 경쟁은 시스템 내부에서든 혹은 외부에서든 이를 조율할 수 있는 장치가 생겨나지 않으면 무한경쟁으로 변하게 되고, 강한 독과점적 형태로 변화될 때까지 계속 진행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자연적인 생태계에서는 이런 일이 안 벌어지지만 사회 내에서는 그 사회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어 붕괴될 때까지 독과점화가 진행된다.

 

88만원세대, 우석훈, 박권일 지음, p. 103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정말 미안하다'는 것이다. 나 역시 지금 20대가 빌빌거리는 것은 책을 안 읽고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으며, 쥐뿔도 없으면서 소비지향적인, 한마디로 아무 생각없이 사는 세대의 자업자득 탓이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나도 꼰대였던 것이다.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작은가 싶어 한탄이 절로 나왔다. 이 책의 핵심어는 승자독식과 세대간 착취다. 수요와 공급이 굉장히(매우 막연한 표현이지만) 많을 경우라면 경쟁은 어느 정도의 합리성을 만들어내지만, 그 경쟁을 시장 원리에만 맡겨둔다면 끝내 독과점화로 진행되고 결국 사회는 붕괴되리라는 끔찍한 예언은 너무 현실적이라서 모골이 송연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게 지금 우리나라 경제의 지향점이라는 것도.

 

이러한 독과점화는 프랜차이징이라는 징후와 함께 우리나라의 자영업 기반을 빠르게 무너뜨리고 있단다. 문제는 이러한 승자독식 양상에 윗 세대들이 아랫 세대들의 몫을 가로채는 세대착취라는 특징적 현상이 우리나라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5년 우리나라를 강타한 1318마케팅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착취하기 편한 우리 사회의 경제적 약자인 10대들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한 마케팅이 낳은 것은 우리 사회의 장기적 성장 잠재력의 파괴다. 왜 그런고 하니, 1318마케팅은 "10대들의 정신세계만 황폐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실제로 10대들의 다양한 감수성이 생겨날 수 있는 공간을 '과시적 소비'로 채워버"(p. 69)렸기 때문이다.

 

이 책 안에는 70년대 개발 독재시대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 경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일들, 유신세대와 386세대를 거치는 동안 벌어진 일과 그것이 지금에 와서 낳은 결과에 대해 아주 논리정연하게 말하고 있지만 - 이것은 읽어보시고 - 내 마음을 건드린 것은 우리나라 자본주의의 비인간적인 얼굴이었다. 나와 내 자식만 잘 살면 다른 사람이야 어떻든 아무런 상관없다는 극단적인 이기주의,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은 지배계급의 이념’이라는 칼 마르크스의 말대로, 아무 문제의식 없이 지배계급의 이념을 자신의 이념으로 착각하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 비정규직의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은 그들이 못나서 그런 것이고, 나나 내 자식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버리는 20대나 지금 10대의 부모들. 나를 포함한 우리들의 얼굴이 생각났다.

 

대통령이 바뀌니 부동산 값이 오른다고 벌써부터 희희낙낙하는 사람들, 세금이 줄어들 거라고 좋아하는 사람들. 그 부동산과 그 세금은 누구의 것일까. 우리나라만한 경제규모에서 한 해 경제성장률 5%라는 기적 같은 일을 이뤄내고 있는데도 아직 우리에게 더 키울 파이가 남아있으니, 분배는 좀더 있다가 생각하자는 사람들, 도둑질을 하든 사기를 치든 잘 사는 게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쏟아져 나오는 삼성의 비자금이 도대체 누구 주머니를 강탈한 것인지 한번쯤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책을 덮으면서 괴로웠던 것은 누구보다 이 책을 읽고 자기 세대의 문제를 짚어보고 연대해야 할 20대들이 과연 이 책을 읽기나 할까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하랴. 그들이 지적 소화력을 상실한 집단 트라우마를 갖게 된 것은,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사교육 광풍으로 인한 것인데.. 그리고 모두 같이 잘 산다는 것을 가르치지 못한 채 다른 애들을 다 물리치고 너만 잘 되면 그만이라고 마음과 행동으로 가르친 바로 우리 때문인데.. 이대로 간다면, 우리 아이들이 맞게 될 세상은 더 험악할 거란다. 정말 진심으로 미안한 것은, 그들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제라도 너희들을 지켜주겠노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다. 미안하고 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