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러갔다

색, 계 - 차가운 적막의 순간

양화 2007. 11. 25. 21:58

 

그 남자의 두려움, 외로움, 차갑고 징그러운 관료 이모의 얼굴 뒤에 숨은 인간의 얼굴. 늙고 왜소한 양조위는 아름답다. 

 

어떤 영화를 보고 나면, 다른 사람은 아무도 기억 못할 어떤 장면만 마음속에 남아 오래 머물곤 한다. 어두운 밤, 영화 속 두 남녀가 차에 탄 채 외줄로 된 숲 속 길을 지나는 장면을 부감으로 담은 장면, 물론 헤드라이트 불빛이 어두운 앞길을 비추고 있었다.(난 어둠 속에서 외로이 빛나는 불빛 장면에 속수무책 무장해제가 되곤 한다) 그리고, 영화 전체의 절정이 - 사람마다 그 절정은 다르겠으나 - 지난 직후, 왕치아즈의 눈길이 머물던 인력거에 달린 삼색 바람개비. 두 장면은 2시간 40분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던 뜨거움을 일시에 냉각시킨 이상하리만치 낯선 적막이었다. 그 장면들은 부분적으로 뜨거워졌던 내 가슴 위에 각얼음 두 개를 올려놓았다. 아아, 이안 감독은 점점 성인(聖人)이 되어가고 있구나!

 

인간이 무엇인지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것은 그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이 너무 다양해서다. 아니, 도저히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는 '모순'이 그 안에서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잔혹과 연민이, 기쁨과 슬픔이, 비열과 정직이, 순수와 퇴폐가 경계없이 함께한다. 아니, 그 경계들은 불균질하게 맞물려있다가 살짝살짝 어긋난다. 그래서 나는 가끔 인간들을 완전히 미워할 수 없다. 색과 계 역시 그렇다. 일제 강점기, 일본의 꼭두각시였던 왕정위 정부의 고위급 간부 이모, 누구를 믿을 수도, 믿어서도 안되는 그가 그를 '색'으로 꾀어 암살하고자 음모를 꾸민 대학의 연극써클 학생 왕치아즈를 만났다. 계를 허물려는 색과 허물어지지 않으려는 계가 만났다.

 

색이 허물어지는 순간, 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에는 마치 신호처럼 아주 짧고 단호하지만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희미한 미소가 나타났다. 폭력적인 첫 섹스가 끝나자 이모가 떠나고 왕치아즈는 잠시 침대에 누워있는다. 그때 입가에 슬그머니 떠오르던 엷은 미소. 그리고 두 번째, 이모의 집에 머물던 왕치아즈의 방에서 섹스를 마친 후, 왕치아즈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이러다 들키겠어요." 하자, 이모의 이마에서 땀이 한 방울 또르르 굴러떨어지면서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 미소가 무슨 의미인지 누가 알랴. 그런데, 그 두 미소는 묘하게 닮아있었다. 상대가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아주 작고 희미해서, 그게 온전히 자신만이 아는 것이라는 점까지. 바로 색과 계의 경계가 어긋나는 순간이다.

 

3년만의 재회에서 왕치아즈는 말한다. 외로웠겠군요. 이모는 답한다. 그 덕분에 살아남았지. 그랬으면서도, 거짓말처럼 어느 순간 의심없이 누군가를 믿어버리는 순간이 찾아온다. 시골마을 소년 소녀의 첫사랑 노래에 거짓말처럼 눈가가 젖는다. 그랬으면서도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녀가 "가요"라고 말했을 때, 깨달음이 번개처럼 들이치던 순간 그는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외로울망정 살아남길 선택한 것이다. 색과 계가 자리를 바꾸는 순간이다. 10시의 시계 종소리가 울릴 때, 왕치아즈의 침대에 앉아 침대를 쓰다듬던 이모는 흠칫 놀란다. 그리고 일어선 그의 뒤에 텅빈 하얀 침대가 남아있듯, 왕치아즈의 앞에는 천길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다. 뒤에 남은 텅빈 침대와 앞에 놓인 천길 낭떠러지는 색과 계의 경계가 몇 번쯤 어그러진 뒤 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도 예측 못할 그들만의 선택.

 

예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나는 인간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 영화는 현실에 모델이 된 인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잔인하게 살해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 여성이란 욕구의 대상일 뿐이라고 믿는 색정광. 이런 인간 안에 있을 인간성이라든가, 다른 평범한 인간들과의 동질성이라든가, 그런 걸 상상하게 만드는 것. 이안의 성스러움은 마음에 드는 인간뿐 아니라 인간 말종까지도 똑같은 인간으로 이해하는 그 깊이에 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오면서 격랑이 휘몰아치는 역사 속에도, 파란만장하기만 한 어떤 인간의 삶 속에도 숲 속의 외길처럼, 바람에 돌아가는 바람개비에 던지는 시선처럼 아주 비현실적일 정도로 차가운 적막의 순간이 점묘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누구의 것이나 드라마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