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 바람 같은 이야기
호시노 미치오 글. 사진/이규원 옮김/청어람미디어/270면/2005
"아무것도 없었던 시대에는, 인간은 자기 생활권 바깥 그 어디에서도 자극을 찾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것은 일상적인 생활을 하다보면 저쪽 편에서 이리로 날아드는 거였어.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찾았던 것은 자극보다는 휴식이었어." 일상은 자극을 필요로 하는 지루한 것, 이라는 생각을 하던 무렵이어서였을 겁니다. 이 대목을 읽고 뜨끔했던 것은.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혹한 속에서 사냥을 해서 먹을 걸 마련하고 잘 때마다 곰의 습격을 대비해야 하는 삶이라면 그럴 법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알래스카의 자연과 사람을 사진과 글에 담은 이 책은 그 담백하고 소박한 눌변이 무엇보다 마음을 끕니다. 그에게 사람은 변화무쌍한가 하면 늘 같은 자연의 일부이며, 생명의 사슬의 한 고리일 뿐입니다. 카리부나 고래, 북극여우, 가문비 나무와 다를 바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는 누구도, 무엇도 예단하거나 비판하거나 단정짓지 않습니다. 그저 보고 느낄 뿐이지요. 그의 말대로 "살아있는 것들 사이에 약속이라는 것이 있다면, 자연 속에서 살아온 인간은 그 약속의 의미를 잘 알 것"이기 때문에 괜한 의미 부여나 미사여구가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나는 그가 112세의 에스키모 월터를 바라보는 그 눈길과 묘사가 마음에 듭니다. "밤이 되자 오두막에는 나와 월터만 남아있었다. 노인은 긴 의자에 눕고 나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한가로운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노인은 천장을 올려다 보고 때때로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 지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뭔가를 생각하는 거라면, 112년을 살아온 사람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물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아마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인지도 몰랐다." 그렇지요. 인간은 깊고도 얕은 존재거든요.
또, 이런 문장은 세상 모든 것의 변화에 대한 포용과 이해를 보여줍니다. "현대화 속에서 마을 사람들의 생활은 크게 변해가고 있다. 하지만 편리한 것, 보다 쉬운 살림으로 옮겨가는 것을, 거기서 살지 않는 사람이 어찌 비판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의식중에 그들의 살림을 오래된 박물관 속에 가두어두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의 살림살이 역시 끊임없이 변해간다." 이런 당연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자연의 파괴와 전통적인 생활방식의 변화를 무조건적인 악으로 판단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봐온 탓이겠지요.
무엇보다 아내는 얼어죽고 아들은 눈앞에서 익사하는 것을 본 후, 한 팔만을 가지고 여전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케니스의 이야기에 오래 마음이 머물렀습니다. "편리한 문명생활에 등을 돌리고, 불편한 한 팔로 카리부를 한 걸음 한 걸음 둑 위로 끌고 올라가는 케니스.... "언젠가 케니스가 나이 더 들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자리에서 가만히 죽어가겠지." 그 주검 위로 얇은 눈발이 내려와 덮히는 광경을 떠올렸습니다. 호시노 미치오는 알래스카를 그렇게 20년간 떠돌다 마흔 셋 되던 해, 쿠릴 호반에서 야영하다 불곰의 습격으로 죽었습니다. 그에게 어울리는, 그가 마음에 들어할 마지막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