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책꽂이에 꽂혀있는 동안
좋은 평들이 가을 감나무의 감처럼 주렁주렁 달렸길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를 사 읽었다. 책은 되도록 사서 읽자는 주의지만, 이 책은 안 사도 될 걸, 싶었다.
이 책을 읽고 좋았다고 하는 사람은 아마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아가씨이거나 결혼을 했더라도 아이가 없는 사람이거나 아이가 있더라도 세 돌을 넘지 않은 외동이를 가진 사람일 게다. 출산이 곧 모성을 불러올 것이고 위대한 모성이 나의 삶을 기적적으로, 그것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 사람들, 아니 적어도 나도 아이를 이렇게 키우고 싶다거나 나도 아이가 세 돌만 넘으면 이렇게 해야지, 같은 희망이 있으니까. 나처럼 남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하는 다소 무책임한 생각으로 얼떨결에 아이를 연년생으로 둘이나 낳고 내가 생각하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굳건히 키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세상의 방식대로 아이를 키우지도 못하고 회의와 긍정과 갈팡질팡을 거듭하면서 어정쩡하게 아이를 키워놓은(게다가 키우는 중인) 사람에게는 아닐 것이다.
나는 책 속의 그녀처럼 영어가 능통하지 못해 세 돌된 아이가 영어로 막힘없이 의사소통을 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2개 국어로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으며, 세 돌 된 아이를 이끌고 터키로, 아랍으로 여행을 떠날 기회를 갖지도 못했으며, 그녀는 출산과 모성의 진한 체험이라고 표현한 여러 가지 삶의 변화들에 공감보다는 그런 건 아이를 낳고 기르면 저절로 오는 건 줄 알았는데, 하며 머리를 갸웃하곤 했기 때문이다. 아이의 말에 끝까지 귀를 기울이기에는 일상과 생활이 너무 번잡했고,(뭐 핑계댈 것도 없이 내 자신이 성말랐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베풀며 나 자신이 받은 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고 화해와 치유의 시간을 갖"기는커녕 내가 가진 "상처와 얼룩"이 아이에게 나쁜 유전자가 되지나 않을까, 늘 노심초사했던 내게는 아니었다.
여행책 얘기에 웬 육아철학이냐고? 이 책은 여행서이지만 한편으로는 육아서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 돌 된 아이를 데리고 무슨 여행이냐는 주위의 타박이나 걱정에 대한 자기 변명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말한다. "부모가 어린아이의 교육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이가 미래에 스스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을 미리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다.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갖기 힘든 것을 잘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이를 테면, 고갈되지 않는 자연에 대한 사랑, 열등하고 약한 것을 보호하고 배려해주는 마음, 고마움을 느끼고 표현하는 법, 혹은 어떤 상황에서도 좋으면 'YES!, 싫으면 'NO!'하고 말할 수 있는 투명함 같은 것들. 정말로 늦어지거나 실기하면 그 사람의 영혼과 인격 밖으로 걸어 나가 되돌아오지 않는 것들, 필생의 숙제가 되는 것들... 부모가 따로 시간과 돈과 품을 내어 아이에게 해주어야 할 것은 어떤 식으로든 아이의 영혼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p.292-293,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중에서, 오소희 지음)
이 말 속에는 그녀가 그런 것들, 그러니까 아이의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갖기 힘든 것들을 아주 잘 알고 있고,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따로 시간과 품을 내어 아이에게 해주고 있다는 뜻이 담겨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말을 조심스럽게 하려니까 문장이 영 이상하다) 망설이지 않고, 갈등하지 않고, 번민하지 않고, 이것이 진실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선 어쩐지 매력을 느낄 수가 없다. 모든 사람에게 여행은 자기 만큼의 깨달음을 가져다 준다. 그래서 망설임이나 회의 때문에 자신이 믿는 진실과 거짓 사이에 불분명한 경계선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행이나 삶은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가져다 줄 거라고 믿는다.
라오스나 터키 같은 주류 여행지가 아닌 곳을 여행하는 것이 유행인 듯한데, 사람들이 그곳에서 얻고 싶은 것은 아마도 때묻지 않은 순수한 인간들과의 만남인 것 같다. 뜻은 좋다. 그런데, 이런 것에 반감이 생긴다. 이런 생각을 가진 여행자가 늘어가면서 편의시설이 점점 늘어가고 사람도 달라지는 것이 당연지사거늘, 장삿속이 환한 사람을 노골적으로 불쾌하게 다루는 그녀의 말투에서 뭔가 뒤바뀐 것 같은 불편함을 느낀다. 자신은 여행자면서 그들을 여행자로 상대하는 장사꾼인 것이 왜 천인공노할 일인지 어리둥절하다. 그들을 변하게 한 것은 어쩌면 그녀 같은 여행자들이었을 텐데.. 왜 그들은 아름다운 볼거리들과 함께 그들의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마음까지 여행자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줘야 하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이 왜 잘못 살고라도 있는 것처럼 그렇게 비난받아야 하는 것인지...나도 그렇게 하니 너도 그렇게 하라는 것인가. 그런데 정말 내가 그렇게 하고 있을까. 글쎄다... 싶다. (이건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종류의 사람이 좋아요, 싫어요, 하는 것과는 다른 뉘앙스다, 오히려 이건 옳고 이런 틀렸어요, 하는 느낌을 받았다.)
여행이 그녀를 늘 그녀 자신을 능가하는 현명함으로 데려다 주었다지만 나는 왠지 믿을 수가 없다. 너무 단단한 그녀에게 여행은 그저 그녀 자신 정도의 현명함, 그러니까 내 생각이 맞았어 하는 정도의 확인만을 가져다 주었을 것 같다. 적어도 이 책 속의 그녀는 자기가 받아들이고 싶은 것만을 받아들이고, 보고 싶은 것을 보며, 표면과의 경계가 불분명한 이면을 회의하지도, 반문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나는 이 책이 책꽂이에 꽂혀있는 걸 볼 때마다 어미인 주제에 아이들이 세 돌이 되기까지 아이들이 그 시기가 아니면 영원히 갖기 힘든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모르고, 모르기 때문에 시간과 품을 들여 그것을 해주지도 못하고, 결핍은 결핍대로 아이가 지닌 숙명이 될 것이고 아이는 어쨌든 그것을 이길 만큼 강할 거라고 내 멋대로 합리화하고 믿어버린 나 자신에 대해 계속 죄책감에 시달릴 것만 같다. 넘치는 모성을 아이에게 온전히 쏟아부으며 어머, 세상은 이런 것이었지, 새롭게 깨닫고 다시 태어나지도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해 자괴감도 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