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무신론자 선언

양화 2007. 9. 28. 16:27

읽기 전에... 무척 깁니다. 밑줄긋기와 동시에 책 전체(600쪽 짜립니다)를 요약한 것이라서요. 잘 까먹어서 나중 기억하려고 요약한 것이니까 그냥 천천히 읽으세요. ^^ 안 읽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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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에 따르면 대부분의 종교는 신을 믿기보다 "믿음"을 믿는다. 모든 종교가 그 신도들에게 바라는 것은 오로지 '믿음'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킨스에게 신은 그저 가설이다. "우주와 우리를 포함하여 그 안의 모든 것을, 의도를 갖고 설계하고 창조한 초인적, 초자연적인 지성이 있다"(p. 51)는 가설. 그에 대한 도킨스의 답은 이렇다. "무언가를 설계할 정도로 충분한 복잡성을 지닌 창조적 지성은 오직 확장되는 점진적 진화 과정의 최종 산물로 출현한 것"(p. 51)이어야 한다. 다신교든 일신교든 마찬가지다. 그래도 사람들은 말한다. 과학으로 설명 안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 빈 틈이 바로 신이 있는 자리죠.. 이게 바로 '겹치지 않는 교도권'이란 NOMA(nonoverlapping magisterium)의 배경이다. 이건 사실 과학이 종교의 주장에 대해 무조건 침묵해야 한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한 것에 불과하다.

 

'만들어진 신'은 대담하게도 이런 속보이는 타협에 반기를 든다. 도킨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귀납적 '증명'을 시작으로 성 안셀무스의 연역적 논증까지 신이 존재함을 증명한 대표 이론들을 차분하게 과학적으로 반박한다. (논리학적으로 전지와 전능은 양립 불가능이란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예술품을 신 외에 어떤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냐는 아름다움 논증에서는 베토벤이나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어째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가, 그건 베토벤이나 셰익스피어의 존재를 증명할 뿐이지.. 라고 말하는데, 순간 뒷통수가 얼얼했다. 신 또는 사탄의 존재에 대한 개인적 경험은 어떤가. 인간의 뇌가 얼마나 모형 구축에 탁월한지를 통해 환각과 환청, 상상 기제로 설명한다. 곳곳이 오류 투성이인 성서 논증은 말할 것도 없다.

 

당연히 다음 순서는 신이 없다는 것이 확실한 이유다. 첫째는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다. 다윈의 이론은 합리적이고 게다가 아름답게 생명의 탄생을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아무리 신기한 생물도(인간의 몸 가운데는 눈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으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환원 불가능한 복잡성) 복잡하지는 않다는 거다. 다윈은 말한다. "무수하게 연속된, 미미한 변형을 거쳐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없는 복잡한 기관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내 이론은 완전히 붕괴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례를 전혀 찾을 수 없다."(p. 194) 더 나아가 "종교가 미치는 진정으로 나쁜 효과 중 하나는 "몰이해에 만족하는 미덕"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이다"(p.196) 창조론자들은 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현재의 지식이나 이해에 나 있는 틈새를 열심히 찾아다닌다. 하지만 사려깊은 신학자 본 회퍼가 우려한 대로 그 틈은 점점 과학에 의해 메꿔지고 있다. 게다가 불완전함은 오히려 신의 부재를 증명할 뿐이다. 완벽한 신이 설계했는데, 결함이라니.. 하지만 점진적인 개선을 향한 누적적인 일방통행인 '진화'로는 설명할 수 있다.

 

이 광활한 우주에 흩어져있는 어느 행성에 생명이 돋아날 가능성은 아무리 낮춰잡아도 몇 십 억 분의 일이란다. (골디락스니, 물리학의 근본상수니, 핵융합이니 하는 설명들이 마구 나온다) 생명의 탄생은 비유하자면 거대한 야적장에 허리케인이 불었는데, 그 허리케인이 뚝딱 비행기 하나를 조립해낸 정도로 비개연적인 사건이다. 우주나 우리 행성은 인간에게 특별히 우호적이고 그것이 바로 신의 존재를 입증한다는 인본주의 논리는 진화심리학자인 앤더슨 톰슨의 말대로 "무생물을 행위자로 인격화하는 (인간의) 심리적 성향(p224)"의 결과물일 뿐이다. 이쯤에서 말할 것이다. 그래, 그 논증이 다 맞다고 치자. 그런데, 신이 있다고 해서 뭐가 그리 문제냐. 종교는 인간에게 선한 동기를 부여하기도 하고, 한 개인에게 위안이 되기도 한다. 세상 모든 문화가 종교를 갖고 있다는 건, 그것이 인간에게 이롭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하기에 앞서 도킨스는 진화론적 입장에서 종교가 얼마나 낭비적이고 사치스러운지 따진다.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존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자연은 푼돈까지 일일이 세고 칼 같이 시간을 따지며 가장 미미한 사치까지 꾸짖는 인색한 회계사다. 다윈이 설명한 것처럼 가차없고 쉴새 없이 "자연선택은 모든 변이, 가장 사소한 변이까지 찾아내기 위해 매일 매시간 세계를 샅샅이 훑는다",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보존하고 추가하며, 언제 어디에서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없이 눈에 띄지 않게 유기적 존재의 개선에 힘쓴다.""(p. 248-249) 그렇다면 종교의 이점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집단 선택 이론'이 있다. 이것은 종교가 있는 집단의 경우, 그 집단에 대한 충성심과 형제애 때문에 종교를 갖지 않은 집단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희생에 기반한 이론은 내부의 배신자에 취약하다는 사실.

 

다음은 과거에 유용했던 심리적 성향의 부산물로서의 종교. 그러니까 종교는 종교 자체로 선택된 것이 아니라 다른 어떤 혜택이었고 그것이 부수적으로 종교적 행동으로 발현되었을 거라는 것이다. 아마도 아이들을 위험에서 구하는 어른들의 말(벼랑 근처에 가지 말라든가, 악어떼가 노는 물에서 헤엄치지 말라든가..)처럼. 진화심리학은 한발 더 나아간다. 인간이 천성적으로 물질과 마음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이원론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모든 것에 목적을 갖다 붙이기 좋아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합쳐지고 거기에 적절한 조건이 주어지면 종교로 향하는 성향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도킨스는 '영생'을 하나의 근거로 든다. "영생이라는 개념 자체는 갈망하는 사고와 딱 들어맞기에 살아남아 퍼진다. 그리고 갈망하는 사고는 중요하다. 인간 심리는 욕망으로 채색된 믿음을 허용하는 보편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p. 290)

 

종교를 지향하는 심리적 성향이 인간에 내재해있다고 하더라도 종교의 세부 사항들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리차드 도킨스는 문화적인 유전의 단위인 밈으로 설명한다. 생물학적으로 "유전자들이 수많은 다른 유전자들과 '협력'함으로써 최종적으로 몸을 만드는 발생 과정들을 프로그램"(p 301)하고, "유전자풀이 각 유전자의 협력 능력에 따라 선택되는 유전적 환경을 구성"(p. 302)하는 것처럼 문화적 생존을 위해 밈풀에서 생존가를 지닐 만한 종교적 밈들이 종교의 세부사항을 구성했으리라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죽어도 살 것이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존경을 받는다" 등등. 또 하나는 화물 숭배의식. 아서 클라크의 말대로 "충분히 발전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선진 문물을 가져온 외부 사람들을 숭배하듯 여러 가지 전설들 가운데 선택되어 살아남은 것이라는 거다.

 

종교는 도덕과 선의 동기가 된다는 말은 어떤가. 도킨스는 무신론자인 자신에게 배달되는 신자들의 편지를 인용하면서 왜 이들은 신이 그런 난폭한 방어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생각한다. 문제는 다윈주의, 혹은 무신론 자체가 악의 근원으로 취급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다윈주의 논리가 "생명의 계층구조에서 살아남아 자연선택이라는 여과지를 통과하는 단위가 이기적인 경향을 지닐 것이라고"(p. 326)  단정짓는 데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건 자연선택의 진화론을 오해한 거다. 유전자는 여러가지 이유로 그들의 생각과 달리 이타적이다. 첫째 유전자의 친족 이타주의(친족이 같은 유전자의 사본을 공유할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에), 둘째 호혜적 이타주의(필요와 그것을 충족시킬 능력의 비대칭 때문에 자연은 서로 협력한다), 셋째, 관대하고 친절하는 평판을 얻음으로써 누리게 되는 다윈주의적 혜택, 넷째 과시적 관대함(내가 너를 돌볼 만큼 강하다)은 속일 수 없는 진정한 광고의 역할을 한다.

 

뒤에 이어지는 인간은 스스로 이타적이고 도덕적이기 때문에 굳이 종교가 필요하지 않다는 여러 논증들은 가슴이 뭉클하기까지 하다. 이제 마지막. 신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선하려 애쓰겠는가. 더이상 말이 필요없는 명제다. "우리가 선하고자 애쓰는 이유는 오로지 신의 인정과 보답을 얻거나 신의 불만과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건가? "그것은 하늘에 있는 거대한 감시 카메라를 돌아보면서 혹은 당신의 머리에 든 아주 작은 도청장치에 대고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는 것이지 도덕이 아"(p. 344)닌 거다. 백번 양보해서 "우리가 도적적이 되기 위해 신이 필요하다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그것은 신의 존재 가능성을 더 높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신의 존재를 더 바람직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p. 350) 

 

다음은 성서 이야기다. 오랫동안 성서는 직접 지시를 하거나 사례를 드는 방식으로 도덕이나 가치관의 원천이 되어 왔다. 그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한번 보자.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보자. 신이 보기에 한 가족만 빼고 인간이 탐탁치 않다고 해서 비를 내려 인간과 동물을 죽이는 일, 소돔이 파괴되기 전 재앙을 알리러 온 천사를 보호하기 위해 딸들을 마을 사람들에게 강간하도록 시키는(다행히 그냥 돌아갔다) 아버지 롯,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아내 대신 딸들과 관계를 갖는(남자에 굶주려 딸들이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기가 막혀서!) 아버지, 사제인 레위인이 첩과 함께 여행을 하다가 한 노인의 집에 머물렀는데,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 손님을 내놓으라고 하자 그 노인은 자신의 딸과 손님의 첩을 마을 사람들에게 내놓았고, 첩은 마을 사람들에게 윤간을 당한 끝에 죽음을 맞는다. 아들을 희생양으로 요구하는 신이나 그 신을 위해 아들을 내놓는 아브라함, 다른 신을 섬겼다고 분노하고 대량 학살을 일삼는모습도 나온다.(모세의 미디아인 대량 학살)

 

많은 이들이 성서를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느 부분은 골라서 믿고 어느 부분은 상징이나 우화로 간주한다는 것인데, 말이 되는가. 집단학살과 그것을 부추기는 이방인 혐오증은 성서 곳곳에 나타난다. 여호수아서에서 예리코 전투는 "남녀노소, 소와 양, 나귀까지 도시의 모든 것을 칼로 철저히 몰살시킬 때까지" 계속된다. 안식일에 쉬지 않은 한 남자를 어떻게 할까 묻는 모세의 물음에 신은 답한다. "그를 야영지 밖으로 끌어내어 돌로 쳐 죽여라" 신자들은 다시 항변할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지만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성서는 도덕적 원천으로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다. 사람들은 야훼 같이 섬뜩한 역할 모델을 자기 삶의 기반으로 삼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나머지 사람들에게 그 사악한 괴물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온세계가 비난한 탈레반의 비마얀 불상 폭파는 독실한 종교적 열의에서 빚어진 것으로 찬사받아야 마땅하다.

 

메카나 샤르트르, 요크민스터, 노트르담, 양곤, 교토의 사원들, 바미얀의 석불들을 불도저로 밀어버릴 무신론자가 있겠는가. 멀리 갈 것도 없다. 당장 몇 백 년 된 사찰의 탑 등에 불을 놓는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이 그 생생한 예다. 미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의 말이 딱 맞다. "종교는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한다. 그것이 있든 없든, 선한 사람은 선행을 하고 나쁜 사람은 악행을 한다. 하지만 선한 사람이 악행을 한다면 그것은 종교 때문이다." 파스칼도 말한다. "사람은 종교적 확신을 가졌을 때, 가장 철저하고 자발적으로 악행을 저지른다."(p. 375) 신약성서는 어떨까. 원죄와 속죄라는 큰 틀로 설명할 수 있는 신약성서 역시 마찬가지다. 진보적 윤리학자들의 말대로 "희생양 이론(무고한 사람을 처형함으로써 죄인의 죄를 대신 갚도록 한다는 것)은커녕 어떤 형태의 응징적인 처벌이론도 옹호하기 어렵다."(p. 382) 절대적으로 선한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어떤가. 당시에 그것은 같은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었다. 살인하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도 마찬가지다.

 

그게 확대 해석이라고? 천만에. 이스라엘 아이들을 대상으로 '여호수아서'를 읽어준 실험에서 그 명백한 대량 학살을 비난하거나 용납하는 견해 차이를 만든 것은 종교였다. (아이들은 유대인이라는 요소를 넣었을 때는 집단학살을 정당화했지만 그것을 3000년 전 중국 왕조의 이야기로 바꾸자 현대적인 도덕적 판단을 내렸다) 물론 성경은 대량학살, 외집단의 노예화, 세계 지배의 명령들을 구비하고 있지만 살인이나 잔혹행위, 강간을 찬미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리아드나 고대 마야인의 암각화 등 다른 고대의 이야기들처럼 '내집단 도덕'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일리아드를 도덕의 토대로 판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종교는 내집단과 외집단 사이의 증오와 불화의 꼬리표이며 피부색, 언어, 좋아하는 축구팀 같은 여타 꼬리표들보다 반드시 더 나쁜 것은 아니지만 다른 꼬리표들이 없을 때 종종 이용되곤 한다."(p. 392) "코소보에서 팔레스타인에 이르기까지, 이라크에서 수단에 이르기까지, 얼스터에서 인도 아대륙에 이르기까지, 경쟁 집단 사이에 거역할 수 없는 증요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계의 어느 지역이든 유심히 살펴보라. 종교가 내집단과 외집단을 가르는 지배적인 꼬리표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아주 높다"(p. 393) 반면, 성서시대 이후로 인류는 꾸준히 변해왔다. 인종차별, 환경파괴, 여성의 참정권 등. 시대정신은 세계 전역에서 넓은 전선을 이루며 나란히 전진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정신의 변화와 종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양한 힘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결과로 시대정신이 점차 전진한다는 명백한 현상 앞에 우리가 선하기 위해 또는 무엇이 선한지 판단하기 위해 왜 여전히 신이 필요한가.

 

도킨스의 무신론은 근본주의적 견해가 아니다. 그러니까 신성한 책에서 읽었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라고 믿지 않는다. 근본주의자들은 그 책이 옳기 때문에 증거가 그것과 모순되는 듯하면 증거를 버리지 책을 버리지 않는다. 이게 종교다. 하지만 과학자는 신성한 책에서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증거를 연구했기 때문에 믿는다. 그러니 다른 증거가 나온다면 언제든 자신의 입장을 바꾼다. 하지만 종교적 절대론은 위험하다. 불경(不敬)을 처리하는 종교의 태도, 동성애 반대의 근거가 되는 종교적 편견, 인간생명의 존엄성을 대하는 종교의 이중적 태도가 모두 절대론에서 나온다. 배아는 아기이기 때문에 낙태를 해서는 안된다면서 낙태를 행한 의사를 총으로 살해한 기독교도. 그에게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란 무엇일까. 이라크 전쟁에 대해 그들은 '테러와의 전쟁'이라고 말한다. 테러가 자체 의지와 정신을 갖춘 영혼이나 힘인 양, 테러리스트의 동기가 순수한 악인 양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동기는 자신들이 올바르다고 인식하는 것, 자신들의 종교가 말하는 것을 충실히 추구하는 데에 있다. 이들은 정신이상자가 아니고 나름대로 합리적인 종교적 이상주의자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선하고 정의라고 믿고 있다. 뒤틀린 개성이나 사탄에 사로잡혔기 때문이 아니라 "요람에서부터 철저하고 의문없는 신앙을 갖도록 양육되었기 때문이다."(p. 465) 이 대목을 읽고 정말 오싹했다.

 

볼테르는 말했다. "불합리한 것을 당신이 믿게끔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이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게도 할 수 있다", 러셀도 "많은 사람들은 생각을 하느리 차라리 죽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한다."(p. 467)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아이들에게 의문을 품지 않는 믿음이 미덕이라고 가르친다. 자신이 믿는 것을 옹호하는 논리를 굳이 펼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p. 468)  "진정으로 유해한 것은 신앙 자체가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행위다. 신앙은 그 어떤 정당화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논증에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악이다. 의문을 품지 않는 신앙이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을 미래의 성전이나 십자군 전쟁을 위한 치명적인 무기로 자라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p. 470)

 

도킨스는 마지막으로 종교가 특히 자라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해악이 큰 것인지 조목조목 짚어주고 있다. 잘못을 하면, 지옥에 간다는 말, 그 지옥의 끔찍함을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학대라는 거다. 죽음에 대한 위로? 그에 대해서는 마크 트웨인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나는 태어나기 전 영겁에 걸친 세월을 죽은 채로 있었고 그 사실은 내게 일말의 고통도 준 적이 없다"(p. 542) 버트란드 러셀의 말도 들어보자. "나는 죽어서 썩으면 내 자아 중에 살아남는 것은 없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젊지 않으며 삶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사멸한다는 생각에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짓을 경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행복은 언젠가 끝난다고 할지라고 그래도 진짜 행복이며, 사유와 사랑도 한없이 지속되지 않는다고 해서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p. 543) 다른 누군가가 당신의 삶에 의미와 목적을 준다는 가정은 유치하다. 진짜 "아름다운 견해는 우리 삶이 우리가 선택한 만큼 의미있고 충만하고 경이롭다고 보는 것이다."(p. 552)

 

이제 결말이다. "여기에 있는 행운을 누리는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거대한 시간의 잣대를 따라 나아가는 레이저처럼 가느다란 광점을 상상함으로써 삶이 상대적으로 아주 짧다는 것을 묘사했다. 그 광점의 앞쪽이나 뒤쪽에 있는 것들은 모두 사라진 과거라는 어둠이나 미지의 미래라는 어둠에 잠겨있다. 우리는 대단히 운 좋게도 그 광점 안에 놓여 있다. 우리가 빛을 쬐는 기간이 얼마나 짧든, 우리가 그것을 조금이라도 낭비하거나, 그것이 흐릿하다거나 시시하다거나 (아이가 투정하듯이) 지루하다고 불평한다면 그것은 아예 살아갈 기회조차 제공받지 못한, 태어나지 못한 무수한 사람들에게 심한 모욕을 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많은 무신론자들이 표현했듯이, 우리의 목숨이 단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면 그것은 훨씬 더 소중해진다. 따라서 무신론적인 관점은 삶을 지지하고 삶을 고양시키는 한편, 삶이 그들에게 무언가를 빚지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자기 환멸, 안이한 생각, 은근히 스며드는 자기연민에 결코 오염되지 않는다."(p. 553-554)

 

과학은 이를 테면, 인간이 뒤집어쓰고 있는 부르카의 창을 넓히는 일을 한다. "우리 정신의 부르카의 난 틈은 좁다. 우리 조상들의 생존을 위해서는 더 넓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p. 565) 하지만 그것은 시간을 거듭하면서 조금씩 넓혀져 왔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검은 옷이 거의 완전히 벗겨질 정도로 넓게 창문을 열리면서 우리의 감각들은 상쾌하고 기분좋은 자유를 느낀다. "우리가 교육과 실천을 통해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로서의) 중간계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우리의 검은 부르카를 찢고, 아주 작고 아주 크고 아주 빠른 것들을 직관적으로 그리고 수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솔직히 나는 답을 알지 못하지만, 인류가 이해의 한계를 넓히고 있음에 전율을 느낀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무런 한계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될지 모른다."(p. 574-575)

 

만들어진 신, 리차드 도킨스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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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이름뿐인 신자로 살아왔다. 신의 존재가 그저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도킨스의 책은 그 이유를 아주 명쾌하게 설명해주었다. 기분이 개운하다. 게다가 인간이나 이 거대한 자연이 그냥 유능한 누군가가 뚝딱 만들어낸 게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조금씩 조금씩 만들어진 거라고 생각하니, - 게다가 지금도 우린 진화하고 있을 것이다 - 이게 백번 더 아름답고 경이롭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아이들이 기독교 계통의 유치원을 다녔던 것에 생각이 미쳤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더니, 아이들은 신을 믿고 있지 않았다. 우주는 대폭발로 이루어진 것이고 하느님이 사람을 만들었다는 건 거짓말이란다. 믿게 만들지 않으면 아이들은 합리적으로 판단할 줄 안다. 책을 다 읽자마자 사람으로 태어나 진화를 몰라서야, 하는 생각이 들어 칼 짐머의 "진화"를 펼쳐들었는데, 정말 너무너무 재밌다. 이것 역시 강추! 종교가 지금보다 더 영향력이 컸던 그 시대에 그는 십여 년에 걸쳐 진화론을 썼고, 그것을 발표할 때가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진보적인 후학에게 편지로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면서 말한다. "마치 살인을 자백하는 것 같군요"

 

파스칼은 신이 있는지, 없는지 반반이라면 믿는 게 더 낫다고 했다지만 - 신이 있으면 다행히 벌을 면할 것이고, 신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 신이 우주의 설계자라면 과학자가 아니겠냐는 도킨스의 말대로 버트란드 러셀의 입장을 취하겠다.  "죽어서 신 앞에 섰을 때 신이 왜 자신을 믿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신이여, 증거가 불충분했습니다. 증거가요."(p. 165) 용기있는 회의주의를 신은 훨씬 마음에 들어하지 않겠나. 

 

정말 마지막으로, 무신론자의 십계명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옮겨둔다. 그냥 어떤 일반인이 정리한 거란다.

 

* 남들이 당신에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

* 매사에 해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라.

* 당신의 동료 인간들, 동료 생물들, 나아가 세계 전체를 사랑과 정직과 성실과 존경으로 대하라.

* 악을 못 본 척하지 말고 정의를 구현하는 데 주저하지 말라. 그러나 잘못된 행위를 솔직히 인정하고 진심으로 후회한다면 언제라도 용서할 준비를 하고 있으라.

* 기쁨과 경이로움을 느끼며 살아라.

* 늘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라.

* 모든 것을 시험하라. 늘 자신의 생각을 사실에 비추어 점검하고, 설령 소중히 믿는 것이라고 해도 사실에 부합되지 않으면 폐기할 태세를 갖추러아.

* 검열을 하지도, 이의를 막으려 하지도 말라. 다른 사람들의, 다른 의견을 낼 권리를 늘 존중하라.

* 자신의 이성과 경험을 토대로 독자적인 견해를 수립하라. 남들에게 맹목적으로 끌려다니지 말라.

* 모든 것에 의문을 품어라.

 

여기에 도킨스는 네 개를 더 덧붙였다.

 

* 자신의 성생활을 즐겨라(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그리고 남들의 성적 성향이 어떠하든 그들도 사적으로 즐기도록 놔두어라. 당신과 상관없는 일이니까.

* 성, 인종, 또는 (가능한 한) 종을 근거로 차별하거나 억압하지 말라.

* 아이들을 세뇌시키지 말라. 그들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법, 증거를 평가하는 법, 당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법을 가르쳐라.

* 자신의 생애보다 더 긴 시간 척도로 미래를 헤아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