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러갔다

즐거운 인생 - 최고가 아니라도 좋아

양화 2007. 9. 16. 00:33

 

월요일마다 인터뷰 때문에 만나는 K는 지난 주 몹시 피곤해 보였다. 재테크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으나 사실 이 친구가 전해줄 수 있는 게 이 증권을 사면 대박이 나고, 이 아파트를 사면 됩니다, 이런 게 아니라 그저 열심히 일하고 아끼고 절약해서 열심히 저축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더이상 들을 이야기가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그런 얘기는 이미 끝난지 오래고, 그 내용을 요리해 글을 써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독자의 눈치를 살피며 어떤 이야기를 끌어내야 하나 싶은데, 아무래도 연예인 이야기가 손쉽다 보니, 어디까지 선을 그어야 하는지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이 많다. 재테크 철학으로 치자면 몇 줄로 요약하면 끝일 이야기를 상황만 바꾸어 중언부언해야 하는 그 친구도 지친 게다. 그동안 시종일관 힘차게 낙천적으로 종달새처럼 떠들던 친구가 푹 가라앉아있다. 그러면서 옛날 이야기 한 자락을 한다.

 

시청률 60% 나오던 국민 코미디 프로그램에 당시 가장 잘 나가던 코너에, 가장 잘 나가던 캐릭터 바로 뒷자리에 앉은 역할이었는데, 6주 연속 자기 대사를 편집 당한 후 그 프로그램은 물론 모든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사실상 추방 당하고 나자 자기 자신에게 완전히 절망해버렸고 이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건 다 내 책임이지 세상 탓도, 누구 탓도 아니라는 생각을 했단다. 아픈 아버지와 부양해야 할 가족, 자기 자신을 책임지기 위해 새벽 프로그램의 별볼일없는 리포터 자리도 마다 않고, 아니 감지덕지하며 열심히 뛰었단다. 그렇게 살아온 게 15년 가까이 된 거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말이 가슴에 얹혔다. "책으로 별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 거 같은데, 그냥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렇지만요, 아직도 한 30% 쯤은 나도 한번쯤은, 언젠가 '스타'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어요."

 

영화 '즐거운 인생'을 보는 동안 그 말이 떠올랐다. 나이가 들어서는 그토록 그리는 젊음이 어찌하여 그때는 그렇게 거추장스럽고 고통스럽기만 했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직업이 학교 선생님인 아내에게 얹혀사는 철없는 백수 가장 기영, 직장에서 잘렸지만 솔직하게 이야기도 못하고 낮에는 퀵서비스로, 밤에는 대리운전으로 40평대 아파트를 유지하며 똑똑한 아들을 지원하기 위해 위해 애면글면 살아가는 책임감 강한 가장 성욱, 아내를 딸려 두 아이를 캐나다로 유학 보내놓고 기러기 아빠 노릇을 하고 있는 중고차 판매상 혁수. 세 친구는 대학 때 함께 밴드를 했던 친구 상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다시 모인다. 충동적으로 일탈하듯 밴드를 결성한 세 친구들은 죽은 친구의 아들을 보컬로 영입하면서 활기를 띠고 무대까지 얻게 되지만 각자 맞닥뜨린 생활과 현실의 벽 앞에서 주춤거리기 시작한다.

 

워낙 감동도 잘하고 눈물도 잘 흘리는 나는 예고편에서 벌써 눈물을 흘렸고 실제 영화를 보는 내내 입은 오목 접시 모양으로 웃고 있었는데, 나름 해피엔딩의 끝장면으로 영화가 끝나자 웬만하면 중년의 인생은 '즐거운 인생'이 될 수 있겠구나 싶어서 안심이 되었다. 젊을 때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최고'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아닐까. 네 친구의 대학시절 밴드가 얻고 싶었던 게 '대학가요제 대상'이었기에 예선 탈락 세 번으로 그들은 밴드를 더이상 돌아보지 않고 남들처럼 살았다. 그렇게 중년이 되면 세상에 최고는 단 하나뿐이라는 거, 그렇지만 꼴찌 역시 단 하나뿐, 나머지는 모두 중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최고가 되기 위해 전부를 걸지 않는다. 그렇게 전부를 걸지 않는 것, 않아도 되는 것, 않아야 하는 것, 그건 중년의 특권이다. 아니, 조건이다. 난 이 영화가 중년에 꿈 찾아 떠난 남자들 이야기라기 보다 전부를 걸지 않아 행복해질 수 있는 모든 중년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영화가 끝난 후의 그들의 삶을 생각했다. 셋은 한 친구는 물건 떼오고, 한 친구는 청소하고, 한 친구는 서빙하면서 '조개구이집'을 열심히 운영할 것 같다. 라이브 공연을 하기 위해 연습도 하고, 자기네 조개구이집을 찾아온 손님들에게 라이브공연을 선사하면서 가끔씩 충만한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K처럼 30% 쯤은 스타의 꿈이 남아있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니까 그게 안되도 불행해지지 않는다. 인생, 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이 영화를 꼭 성 정치학으로 볼 필요는 없겠지만 그런 해방구나마 가질 수 있었던 남성들에게 비해 여성들은 그런 남성들을 착취하는 구도인데다 이 남자들이 누릴 수 있었던 해방구조차 갖고 있지 않을 듯해 찜찜했다. 그러니까, 중년의 그런 행복도 젊을 때 한번쯤은 뭔가를 불살라 잉걸이 남아있어야 누릴 수 있는 건가. 여성들에게는 뭐가 될 수 있을까. 친구도 없고, 밴드도 없고, 직업도 없고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어쩐지 기운이 빠지긴 했다.

 

엄마에게 가끔 영화를 보여드리자 생각하고 볼 만한 영화가 있을 때면 함께 가곤 했는데, 엄마가 얼마전에 친구분이랑 본 '화려한 휴가'도 좋았다면서 이러다 영화광이 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물론 같이 보기에 참으로 불편하다. 오는 전화 다 받아 통화 내용 생중계하시지, 판소리 추임새 넣듯 영화 보는 내내 뭐라뭐라 촌평 하시지(이 촌평은 대개 전혀 맥락이 없는 생활 속 수다 차원이다), 한 30분 남아서부터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안절부절하시지, 엄마 옆자리에 앉았던 아가씨 관객 하나가 아주 죽으려고 했다.

 

 

 

어머, 그리고 애 같던 장근석은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깜찍하게 이뻐졌는지... 제일 모호한 캐릭터인데도 아주 영악하게 제몫을 해낸다. 끼도 있고 연기뿐만 아니라 셀링포인트로서의 자기 역할을 아주 잘 아는 눈치다. 근데, 요즘은 이렇게 젊고 예쁜 남자애들은 남자로 보이는 게 아니라 다 아들로 보여서 죽겠다. ㅜ_ㅜ 벌써부터 좋은 입소문이 돌고 있는데, 이러다 이준익 감독은 국민감독이 되겠다. 오래전에 마음 먹은 대로 더 늙기 전에 기타를 배워봐야겠다 싶다. 소규모로 기타 배우는 모임이 꾸려진다는 방을 보고 문자메시지를 넣어뒀다. 한 2년쯤 배우면 내 나이 마흔에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에 반주 삼아 한 두 곡 정도는 칠 수 있지 않겠나.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은데, 그걸 해서 뭘 어쩌게, 이러면서 기운 빼는 거 안 하는 게 좋을 거 같다. 더 나이 들어서 그때 할 걸, 하고 분명히 후회하게 될 테니까. 최고가 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모든 것을 걸지 않아도 된다. 젊은이에게는 차마 할 수 없는 말, 하지만 그 애들도 어느 날엔가 알게 될 그 진실, 그걸 알아버린, 그래서 그렇게 살 수 있는 중년은 행복하다. 중년인생, 즐건인생!!

 

 

삽입된 노래들이 은근히 중독성이 있다. 약간 촌스러운 듯한 '터질 거야'도 좋고, 마지막에 나온 '즐거운 인생' 주제곡도 소박한 맛이 있다. "끝까지 노래할 거야. 난 너를 향해 나 미치도록 난 외칠 거야. 이것이 바로 나의 즐거운 인생, 그대가 있어 난 행복한 걸. 이 세상 사람 따가운 시선 난 절대 신경쓰지 않아, 하늘 끝까지 달려갈 거야. 이 세상 누구보다 소중한 건 바로 그대, 바로 나잖아' 하는 후렴구는 계속 입속에서 맴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