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언젠가 면회하러 갔을 때, 당신은 누구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난 내가 누군지 몰라요. 텅 빈 느낌이에요."
나는 그 느낌에 대해 얘기해달라고 했다.
"잠을 자지 않고 자리에 나와 있지 않을 때는, 유리판 위에 얼굴을 대고 영원히 누워 있는 느낌이에요. 유리판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죠.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는 외계의 별들이 보여요. 거기엔 원이 있어요. 한 줄기 빛이 비치는 원 말예요. 그 빛은 내 눈에서 나오는 것 같아요. 항상 내 앞에 있으니까요. 그 주위에는 내 사람들이 관에 누워 있어요. 뚜껑은 아직 닫혀있지 않아요. 그 사람들은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요. 그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어요. 아직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간 건 아니라서 비어있는 관도 있어요. 아직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간 건 아니라서 비어 있는 관도 있어요. 데이비드와 다른 아이들은 다시 한 번 삶을 얻을 수 있길 원해요. 나이 든 사람들은 희망을 포기했어요."
"이곳은 뭐죠?" 나는 그에게 물었다.
"데이비드가 이름을 붙였어요. 그 애가 만들었으니까. 그 애는 여기를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라고 불러요."
빌리 밀리건, 대니얼 키스 지음, p. 585
역사에 만약, 이란 건 없다니까 사람의 지나가버린 삶에도 마찬가지겠지. 그래도 만약에, 만약에 빌리 밀리건이 그 일을 겪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에 그가 그 일을 겪지 않았다면, 그는 아서처럼 냉철하고 논리적인 변호사나 의사가 되어 바쁘게 살아가고 있거나 앨런이나 타미처럼 기술적으로도 감성적으로도 뛰어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연민이 많아 누군가의 고통이 '횃불'처럼 보인다는 대니나 데이비드가 되어 연약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하며 살아갔을지도 모르고, 재담을 즐기는 리가 되어 그의 아버지처럼 스탠딩 코미디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무엇이 되는 건,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그로 살아갔을 것이다. 코미디언처럼 우스갯소리를 던지면서 제 할 일을 냉철하게 잘 해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재능과 감수성이 풍부한, 게다가 호감을 주는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그냥 어떤 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빌리가 9살 때, 의붓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생매장된 채 숨구멍으로 꽂힌 대롱을 통해 그 아버지의 오줌을 받아마셔야 했을 때, 엄마가 멍투성이로 얻어 맞고 머리칼이 한 웅큼 뽑힌 채 피 묻은 수건을 대고 있을 때, "빌리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 (그리고는)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어둠 속에 앉아 이 가정에는 왜 고통과 상처가 가득한지 이해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는 폭력을 행사한 자를 죽이는 대신 분노와 슬픔과 한을 안으로 터뜨렸다. 그 파괴력은 그를 24개로 산산조각냈고, 24개의 인격들은 그를 대신해 살아갔다. 문득문득 빌리가 잠을 깨면 그는 자신이 왜 아직도 살아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인격들은 저마다의 삶을 살아갔으므로 빌리는 때때로 시간을 잃어버리고 어리둥절해졌다. 사람들은 그를 변덕스러운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만약에 그를 단순히 그냥 거짓말쟁이로 생각하지 않고 그 아이에게 적당한 때에, 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그의 곁에 있었다면 빌리 밀리건 안의 폭력적인 인격들이 저지른 마약 밀매, 주유소 강도, 강간이 일어났을까. 누군가는 다중인격은 없고, 뛰어난 연기자가 있을 뿐이라고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도 잘 알 수 없는 존재이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조건 혹은 시스템이라는 것도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다중인격을 믿을 수밖에 없다. 강간범으로 처음 체포된 1977년부터 그는 스물 네 개의 인격을 하나로 통합하는 치료를 받기 시작한다. 그러나 융합은 눈물겹도록 어렵다. 그 한복판에서 그는 위에서처럼 말한다. "데이비드와 다른 아이들은 다시 한 번 삶을 얻을 수 있길 원해요. 나이 든 사람들은 희망을 포기했어요" 그는 그곳이 '죽음을 기다리는 곳'이라고 했지만 새로운 삶을 싹트는 곳이기도 한 거라는 걸 안다. 물론 그가 그걸 얼마나 간절하게 염원하는지도.
그 염원 덕에 그는 결국 인격을 융합하는데 성공했다. 체포된지 꼭 14년만의 일이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을 잡으러 왔다고 생각했지만 후에 그것은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빈 관에는 24개의 그의 분신이 모두 들어찼을 것이다. 거기에 다시는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대못을 박고 깊이깊이 땅에 묻고 빌리 밀리건은 바지단에 묻은 흙을 털어냈을 것이다. 누가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면, '빌리 스탠리 밀리건'이라고 대답하고 편안한 미소를 지어보일 것이다. 14년씩이나 최고의 전문가를 동원해 그를 보살핀 것이 옳은지, 사회화 결과물로서의 그를 그냥 인정하고 그냥 다른 범죄자와 같이 처리하는 것이 옳은지, 그걸 묻기 전에 그냥 그런 생각을 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래서 부서질 만큼, 누군가를 아프게 해선 안돼, 얼마나 훌륭한 인간이 되느냐가 아니야, 인간인 이상 그저 그 자신으로서 살게는 해야 한다는 거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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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는 호기심이 많아 아기가 처음 말을 하게 되면 무슨 언어로 말을 할까 궁금해서 유모에게 아이에게 절대 말을 걸지 말라고 했단다. 아기는 무슨 말을 처음으로 했을까. 프리드리히 2세는 몇 번이나 시도를 했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아기가 입을 떼기도 전에 모두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아기가 자라는 데 필요한 건 젖만이 아니었던 거다. 오해가 있을 것 같아 말해두는 데, 이 책은 픽션이 아니다. 인간 존재의 조건을 묻는, 소설보다 더 극적인 이 책은 '배트맨과 로빈'의 감독 조엘 슈마허 감독에 의해 the crowded room이라는 제목으로 곧 영화화된단다. 주인공은 누굴까? 존 쿠색, 브래드 피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숀 펜, 조니 뎁 등이 거론되었지만 아직 고심 중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