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러갔다

조디악 - 그를 둘러싼 사람들

양화 2007. 9. 2. 00:09

 

난 이 영화를 진작에 봤다. 시애틀에 있을 때, 갈 날을 정하고 애들 떼놓고 동생과만 나와 저녁을 먹고 아무래도 아쉬워 심야 영화를 본 것이다. 그 유명한 데이빗 핀처의 신작으로 미국내에서도 호평이 잇따르고 있었다지만 그땐 전혀 몰랐다. 무슨 영화를 하는지 알아봐준 제부는 심지어 이 영화가 '공포영화'라고 소개했다. 미국간지 무려 8개월만에 미국 멀티플렉스 첫 경험이었다.(정전 되었을 때, 시간 때우러 간 적이 있었구나, 참) 한적한 호숫가에 선 차 한 대, 그 차 곁으로 다가왔다가 사라진 차 한 대가 다시 돌아왔다. 70년대 팝송이 흐르는 가운데 갑자기 총성이 울리자 죄 지은 것도 없이 가슴이 철렁했다. 자막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얼키고 설킨 관계, 수사상 전문용어들, 숨도 안 쉬고 다다다 쏟아내는 대사들... 영화 이해에 별로 도움 안 되는 간단한 대화들을 알아듣는 것으로는 이 영화의 전모를 알 수 없었다. 딱한 일이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사람 그림자라고는 없는 동네의 텅 빈 호숫가와 공원, 뒷산으로 오르던 길이 떠올랐다. 누가 차 타고 가다가 총 쏘고 가버려도 목격자도 없겠구나 싶어 새삼 오싹해졌다.

 

한국 개봉날짜가 잡히자 올 여름 꼭 보고 싶은 영화로 꼽아두었다. 아프간 피랍 사태에, 커피프린스 1호점에, 대선 각축에,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현실에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던 때였다. 남편과 함께 보려고 이렇게 저렇게 시간을 잡아보았으나 상영시간이 하루에 두 번밖에 되지 않는데다 남편도 바빠서 미루고 미루다 결국 마지막 상영일이 닥쳤다. 그날 역시 남편은 도저히 시간을 뺄 수 없다고 해서 그냥 나 혼자 보러가게 되었다. 한국판 '살인의 추억'이 이 영화의 대표적 홍보 문구였는데, 어느 정도는 정확하다. 미결 연쇄살인 사건, 주요 용의자에게 결정적 단서가 나오지 않는 것, 무엇보다 이것이 살인과 범인이라는 상식적이고도 중요한 소재를 과감하게 버리고 살인사건을 둘러싼 사람들 이야기로 풀어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 차이는 지방 소도시에서 일어난 연쇄 살인사건 속에 80년대의 한국 사회를 통으로 버무려 넣은 것은 우리나라라서 가능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연쇄 살인범이 일으킨 살인사건 주변에 머문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더 나아가 그를 뒤쫓는다는 건. 범인은 호모일 거라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협박편지를 받은 폴 에이브린이 자기 옷에 '나는 에이브린이 아닙니다'라는 뱃지를 달고 다니는 장면을 보면서, 아마도 그런 것이 아닐까 했다. 나는 이 살인사건과 무관합니다, 뱃지를 달고 싶은 것. 영화는 어떤 순간에도 살인범 조디악의 면모를 그리지 않는다. 무슨 트라우마가 있다든가, 어떤 괴벽이 있다든가 - 설치류에 대한 과도한 사랑이 나오긴 하나, 그게 그의 성격과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 파고드는 것까지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 한번도 그렇게 접근하지 않는다. 피해자나 그들 가족을 다루지도 않는다. 형사들은 조사하고 기자들은 취재하는데, 조디악은 도통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사람을 죽이는 게 동물을 죽이는 것보다 좋다 ... 나는 죽어 내가 죽인 사람들을 노예로 부릴 것이다"라는 편지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조디악을 쫓는 사람들은 무력해보인다.

 

살인사건이 길어지는 동안 그 살인사건으로 명성을 얻고 싶었던 어떤 기자는 폐인이 되어가고, 형사들은 지쳐간다. 데이빗 토스키는 가장 유력한 용의자에게서 결정적 증거가 안 나와 결국 체포할 수 없게 되자 '살인의 추억'의 '미치도록 잡고 싶었다'는 카피를 이렇게 비튼다. '제일 끔찍한 건, 그만 이 일을 끝내고 싶어서인지, 그 놈이 정말 범인이라고 확신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그 맘 알 것 같다. 민간인에게 사건 정보를 줄 수 없다면서 로버트를 돕는 형사들을 보면, 살인사건 같은 명백한 불의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 그걸 끝내고 싶은 마음, 그걸 해결하고 싶은 마음. 그래서 그 불의를 조금이라도 덜고 싶은 그 마음. 웬지 불특정 다수에게 빚진 거 같은 그 마음. 살인사건의 근처에 있는다는 건 매우 희귀한 경험이다. 우리에게는 그게 늘 저 멀리 있는 것이라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범죄가 무서운 건, 그파괴력이 피해자에게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제이크 질렌할, 마크 러팔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모두 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