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양선아 옮김/303면/강/2003
한때 '여성스런 문체'라는 말을 욕으로 생각하며 듣고 쓰던 때가 있었습니다. 철이 없었지요. 섬세하다거나 아기자기하다는 말도 소심하고 잘 삐치는 성격을 듣기 좋게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더랬지요. 네덜란드의 화가 베르메르의 그림 '진주 귀고리 소녀'를 중심으로 쓰여진 이 책은 '여성스런 문체', '여성스런 소설'의, 좋은 의미에서의 실체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17세기 네덜란드를 그려내는 상상력은 정적이고 조용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짚어보는 솜씨는 조심스럽습니다.
타일공의 딸 그리트는 사고로 시력을 잃고 직장을 잃은 아버지 대신 돈을 벌기 위해 화가 베르메르의 집 빨래 담당 하녀로 갑니다. 처음, 그리트를 만나러 왔을 때 베르메르는 그녀가 썰어 색깔별로 나눠놓은 야채들을 봅니다. 베르메르는 순무와 양파, 같은 흰색 야채에도 다른 빛이 숨어있다는 것을 아는 그 아이를 데려옵니다. 빨래를 하고 장을 보러 다니고, 무엇보다 그림 그리는 과정과 그 주변을 알아가면서 소녀는 점차 삶과 자신이 속한 세상과 그 바깥의 세상에 대해 알아갑니다.
소녀와 숙녀의 경계, 넘봐서는 안 되는 저쪽 세계와 내가 속한 이쪽 세계의 경계, 이런 경계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푸줏간 아들처럼 예술 따위는 몰라도 손톱 밑에 빠지지 않는 핏물을 들인 채로 삶을 배고프지 않게 살아갈 수 있겠지만 그리트는 그 세계를 보아버린 아이입니다. "내 삶을 아름다운 색과 빛으로 채울 수 있었던 시간 대신 물을 긷고, 빨래를 쥐어짜고, 마룻바닥을 닦아내고, 요강을 비우던 시간들이 밋밋한 풍경화처럼 내 앞에 펼쳐졌다. 저 멀리 바다가 보였지만 결코 닿을 수는 없다."
마님의 진주 귀고리는 그 세계를 나타냅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 귀고리. 한쪽은 자신의 손으로 뚫지만 다른 한 쪽은 그에 의해서 뚫어진 양쪽 귀는 그 불균형한 마음의 세계를 상징합니다. 탐해서는 안될 그 세계를 탐한 댓가로 파국을 맞을 때, 그리트는 "따뜻한 벽돌담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고 구름 한 점 없는 날이었다. 아이들은 거리를 내달리며 소리지르고, 연인들은 마을의 수문을 빠져나가 풍차를 지나서 운하를 따라 산책하기 좋은 날이었다. 할머니들은 양지 바른 곳에 앉아 따뜻한 햇살에 얼굴을 두고 있을 것이다. 내일은 몹시 추워질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봄 같았다"고 합니다.
내일은 추워질지 모르지만 오늘까지는 봄입니다. 담담하게 그것을 인정하는 그리트는 반 레이원후크의 당부대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은" 아이입니다. 베르메르의 유언에 따라 진주 귀고리를 받은 그리트는 그것을 팔아 베르메르가 남긴 푸줏간 빚을 청산하고 남은 동전 다섯 개를 간직합니다. 그녀는 다짐하지요. 남편인 푸줏간 아들 피터와 아이들이 볼 수 없는 그녀만의 장소에 두겠다고. 고요한 베르메르의 그림처럼 이 책은 여성적입니다. 삶의 비밀을 큰 소리로 선언하는 대신 안으로 새긴다는 점에서요. 저는 이제 '여성적'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