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히스토리쿠스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뒤로 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 p. 110-111
이것이 인간인가, 프리모 레비 지음
이 구절이 이 책의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다. 하지만 수용소가 아닌 곳에서 사는, 그러니까 우리가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윗 구절은 진실이리라. 이것이 인간이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이며, 동시에 가장 완벽한 조건에서도 완전하게 행복할 수 없는 까닭이다.
프리모 레비는 이탈리아 유대인이다. 1919년에 태어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대학 다니던 무렵 인종법이 선포될 때까지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는 그저 단테의 '신곡'을 뼛속 깊이 새긴 이탈리아인이었다. 파시즘의 광풍이 휘몰아칠 적에 그는 '자유와 정의'를 위해 저항운동을 하다가 어느날 붙잡혀 유대인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가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8개월 동안 그는 거대한 실험실에 있었다. "나이, 사회적 지위, 출신, 언어, 문화와 습관이 전혀 다른 수천 명의 개인이 철조망 안에 갇힌다. 그곳에서 그들은 규칙적으로 되출이되고 통제 당하는, 만인에게 동등한 삶, 그 어떤 욕구도 충족되지 않는 삶에 종속된다. 이 삶은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놓인 인간이라는 동물의 행동에서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실험장이다."(p.132) 그곳에서 개인은 "모두 절망적일 정도로, 잔인할 정도로 혼자"(p.133)다. 그래서 그들은 한순간도 생존을 위한 투쟁을 멈출 수 없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도덕 세계의 한 부분이라도 포기하지 않은 채 생존"할 수 없다. (p. 140)
배고픔, 추위, 분노없는 구타, 항상 대기 중인 죽음, 모욕. 그곳에 사는 동안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보통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도덕률들은 더이상 힘을 잃는다. 그들은 훔치고, 옆 사람의 빵을 얻기 위해 아무 연민없이 그가 죽길 바란다. 프리모 레비는 부나 화학공장에서 전문가로서 일을 할 수 있는지 시험을 치르게 된다. 독일의 화학전문가가 그를 바라볼 때, "그 시선은 두 명의 인간 사이에 흐르는 시선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두 존재 사이에 놓인, 수족관의 유리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 같은 그 시선의 성질을 속속들이 설명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는 "제3제국의 그 거대한 광기의 본질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p. 162) 그들은 "머리카락도 없이, 이름도 없이, 체면도 없이 노예처럼 비천하게 일하고 매일 얻어맞고 매일 굴욕을 당한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도 반항, 평온, 혹은 믿음의 빛이 담겨있다. 그러나 억압자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단지 진흙투성이의 누더기를 입은 굶주린 도둑, 사기꾼을 보며 원인과 결과를 뒤섞어 수용소 사람들이 그런 굴욕을 당해 마땅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체력이든 희망이든 바닥이 날 때까지 그들은 일을 하다가 시시때때로 가스실 선별작업을 거친다. 병약한 사람들은 가스실로 뽑혀가고 그들은 가스실로 끌려가기 전날, 다른 때보다 양이 많은 죽을 받는다. 한 사람이 가스실로 분류되었지만 죽을 평소처럼 받자 그는 두 배의 죽을 줄 때까지 끈질기게 배급자 앞에 서 있는다. "인간의 한계를 완전히 넘어설 정도로 고통스러워야 할 것 같은, 죽음을 앞둔 나날들도 다른 날들과 다름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흘러간다."(p. 193) 전쟁이 끝나가자 또 다시 선별 작업이 시작된다. 퇴각하는 독일군이 데려갈 사람들과 남길 사람들을 나눈다. 행운의 여신은 독일군 쪽에 있는 것 같았고 곧 죽을 것 같은 아픈 사람도 억지로 독일군을 따라가다가 결국 사살되고, 지옥같은 퇴각 행군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또 목숨을 잃는다. 수용소 병동 막사에 버려진 레비는 폭격을 피해 비워진 수용소를 뒤져 쓸모있는 것들과 식량과 물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것으로 연명한다. 병동 막사 안에는 전염병이 돌고 살아남은 사람들조차 하나둘씩 죽어간다. 그리고 레비는 마침내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p. 241)
*********
아우슈비츠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에서 행한 수많은 일들, 알제리에서 학살을 자행한 프랑스 병사들, 베트남에서 학살을 자행한 미군, 우리나라의 광주, 70년대 독재시설 사상범들의 감옥, 유대인 자신이 팔레스타인에서 저지르고 있는 일들, 그리고 세계 어느 곳에나 있는 감옥과 정신병원. 그러니까 그것은 "불관용, 압제, 예속성 등을 내포하고 있는 새로운 파시즘이 이 나라 밖에서 탄생되어 살금살금, 다른 이름을 달고 이 나라 안으로 들어올 수도 잇다. 혹은 내부에서 서서히 자라나 모든 방어장치를 파괴해버릴 정도로 난폭하게 변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지혜로운 충고 따위는 아무 쓸모가 없다. 저항할 힘을 찾아야 한다. 이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유럽의 한복판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한 기억이 힘이 되고 교훈이 될 것이다."(p. 304)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우리에게 이런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얻은 것, 누리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서 얻은 것인지 잊는다면 우리는 더이상 인간이 아니다.
며칠전 선배와 함께 '캐러비안의 해적'을 보았다. 특별히 재능있는 배우 조니 뎁이 창조해낸 독특한 해적 캐릭터는 매력적이었지만 이야기 자체에는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심지어 졸기까지 했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역사와 현실이 없어서였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 그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 레비는 수용소에서 꿈을 꾼다. 집으로 돌아가 평화로운 저녁을 보내는 모습. 하지만 자신이 겪은 고난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자 "마음 속에서 황폐한 슬픔이 서서히 자라난다"(p. 89)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우리가 어떤 근본적인 뜻밖의 사건을 집단적으로 목격했다는 것, 너무 뜻밖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예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본적인 것, 정말 이런 일이 과거 언젠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바로 이것이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뿐안이 아니라 꼭 살아남아 우리가 목격하고 참아낸 일들을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의지가 생존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암흑과 같은 시간에도 내 동료들과 나 자신에게서 사물이 아닌 인간의 모습을 보겠다는 의지, 그럼으로써 수용소에 널리 퍼져 많은 수인들을 정신적 조난자로 만들었던 굴욕과 부도덕에서 나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고집스럽게 지켜낸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되었다"(p. 307)고 밝혔던 레비는 1987년 어느날 갑자기 자살했다. 그가 이야기하는 이 모든 것들은, 진실이 언제나 그렇듯 우리들 상상을 뛰어넘는다. 실제로 일어났던 어떤 일이 우리들 상상 밖에 있을 수 있다는 공포. 그 공포를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역사를 알아야 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