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서평

삼월은 붉은 구렁을

양화 2007. 5. 20. 13:44

 

 온다 리쿠 지음/권영주 옮김/400면/북풀리오/2006

 

독서의 세계를 일러 '상상계'라 칭한 사람이 있습니다. 실재하지 않지만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만들어지는 그들만의 세계. 듣는 순간, 그렇겠구나 했습니다. 온다 리쿠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그런 상상계를 체현한 소설입니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제목만 존재하는 책을 둘러싸고, 독자와 작가와 편집자와 미래의 작가에게 바통을 넘긴 불행한 잠재 작가, 네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세계는 실재하지도 않는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책을 빼버리면 그대로 우르르 무너져버립니다. 그런데, 그 밖에는 실재로 그 책이 존재해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지요. 

 

온다 리쿠를 비롯한 일본 작가의 장기는 책 속 공간도 아니고 실재 세상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살짝 벌어진 채 존재하는 기묘한 세계를 그려내는 데 있는 것 같습니다. 십 여 개의 방마다 책이 꽉 차있는 고급 주택  안에서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책을 찾아내는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샐러리맨 고이치는 그 주택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발을 들여놓는 순간, 불현듯 현기증을 느낀다. 초점이 흔들린 것처럼 흐릿한 이차원 세계에 들어가는 듯한, 현실과 조금은 어긋난 공간에 들어선 듯한 느낌."

 

오랜 추리 끝에 드디어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라는 작가의 정체를 알아내고 그를 찾아가는 여정길에 오른 편집자는 기차역에서 서성이는 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비일상으로 이행하는 시간의 경계". 작가의 집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도착했을 때, "집 앞에는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잘은 몰라도 벚나무 같다. 그 뒤에서 서서히 시간에 짓눌려 가는 집과는 달리 굵직한 가지에는 푸른 잎사귀가 눈이 부시도록 무성하다. 집의 영양분을 몽땅 빨아들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차피 인간이 만든 것 따위 식물에게 이길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이, 일상처럼 보던 무성한 나무와 낡은 집과 햇빛이 내리쬐는, 난간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한적하고 평화로운 공원은 기묘한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곤 합니다. 누군가 부지불식간에 그곳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 입구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무심한 일상이 계속됩니다. 입구로 들어간 그들은 검은 토끼가 나타나는 습원 한가운데 자리한 사립학교에 도착하기도 하지요. 현실이라는 세계에서 떨어져나간 진짜 세계의 자투리'처럼 말입니다. 그곳은 이미 죽어버린 한 세기도 전의 작가가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여행가방을 들고 공간을 초월해 떠도는 곳이기도 합니다.

 

책을 읽고 있으면, 이야기란 것은 "괴물 같은" 것, "그저 그 존재만으로 겹겹이 베일을 둘러가고" 있고 "이미 실체도 없고,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는데도, 간단히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리는 것"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진짜 이야기란" "존재 그 자체에 수많은 이야기가 보태져서 어느새 성장해 가는 것, 그게 이야기의 바람직한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말입니다. 책 속의 이야기들은 다 다른 데, 그것이 모여 아귀가 딱 맞는 책이 되는 것을 보면, 책에 나온 편집자 말대로 글은 작가가 쓰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나무에서 따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데 동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참으로 기묘한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