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의 감각
수번이다.
"우리는 독일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뭔가 할 말이 있다. 그것도 할 말이 많다고 느꼈다. 그리고 독일인도 그것에 대해서 우리에게 할 말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서둘러 결론을 내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험이 끝난 후 체스 게임에서 말을 옮겨놓듯 질문하고, 설명하고, 해설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는지, 아우슈비츠에 대해서, 일상의 조용한 학살에 대해서, 자신의 집 바로 앞에서 일어난 일을.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과 얼굴을 맞대고 교회 문을 빠져나갈 수 있었는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우리의 혹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배워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다, 그것도 모든 것을 지금 곧. 나는 팔뚝에 새겨진 번호가 찢어진 상처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 프리모 레비 <휴전> 중에서 p. 199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서경식 지음, 창비) 중에서 재인용
재일조선인 에세이스트 서경식은 이탈리아 토리노로 향하는 기차에 앉아있다. 그가 찾아가는 곳은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무덤. 그는 이탈리아에 거주하던 유대인 가운데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7500명에서 생존한 약 800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43년 반파시즘 투쟁을 하다가 붙잡혀 유대인이 아니면 총살이요, 유대인이면 수용소행이라는 선택의 갈림길에서 수용소행을 택하고 1945년 연합군에 의해 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2년 동안을 그곳에서 보냈다.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온 몇 안되는 유대인 가운데 하나. 그는 '비교적' 인생과 인간을 낙관하며 자신의 수용소 시절을 책으로 써냈다. 그는 스스로 '증언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자각했고 거기에 충실했다. 그렇게 늙어가던 그가 어느날, 자신의 집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 단 한 마디 유언도 남기지 않은 채였다. 서경식의 묘지 방문길은 그는 왜?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알프스로 둘러싸인 추운 토리노로 가는 길에는 눈이 내렸다. 한기는 서경식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불러온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거기 쓰여진 숫자들에 경악하고 또 경악했다.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나치 독일의 손이 미치는 모든 지역에서 유대인 사회가 파괴되고 그 "파괴의 기억까지도 말살되었다". "약 9백만 명의 유럽 유대인 중 3분의 2가 살해되었다. 특히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유대인 주민의 9할이 살해되었다."(p. 107) 수용소로 보내진 사람들은 대부분 육체노동이 가능한 젊은 남녀에 국한되었고 그렇게 선별되고 남은 노인과 아이, 여자, 환자들은 수용소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살해당했고, 수용소의 최종 목표도 노동을 통한 죽음(절멸)이었다. 강제노동수용소는 '절멸수용소'였다. 역설적이게도 그 수용소 문 앞에 붙은 문패는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Arbeit macht Frei)'. 그 말은 다른 측면으로는 진실이었다. 노동을 하는 동안은 "같은 인간인데 왜?"라는 사고가 작동하지 않았고, 자신을 소진하는 노동 끝에 죽음은 어떤 의미에서 자유였기 때문이다.
"그 참혹한 재앙 이전에 프리모 레비는 자신이 유대인 출신인지 아닌지가 '주근깨' 정도의 '사소한 차이'에 불과하다고 믿고 있었다. 무솔리니의 반유대 조치가 '시약'이 되어 그는 이탈리아 사회에서 '불순물'로 분류되어갔다. 아우슈비츠로 이송될 때는 '토지 없는 민중이 오랜 옛날부터 겪어온 고뇌'를 맛보았다. 부나에서는 '노예 중에 노예'로 취급되었다. 작업에 배치된 실험실의 민간인 여성에게서도 '냄새나는 유대인'이라고 멸시를 당했다. 그 모든 과정은 보편적 '인간'이라는 18세기 말 이래의 계몽주의적 이념에 대한 커다란 반동이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겪고 프리모 레비는 '유대인'이 되어, 묘비에 히브리어를 새겨놓은 것이 의미하는 것러첨 '유대인'으로 묻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어떤 죽음일까? 어떤 절망이 혹은 어떤 권태가 그에게 밀어닥친 것일까?" p.147-148
더 끔찍한 것은 이것이 나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메리카 대륙에 먼저 상륙한 에스파냐인들의 이야기를 적은 라스 카사스의 '인디언 파괴에 관한 간결한 보고서'에 따르면 아메리카 도착 이후 40년 동안 1200만명 내지 1500만명의 원주민이 비인간적인 방법으로 희생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에 저질렀던 일, 미국이 아프리카에 저질렀던 일, 그리고 일본이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했던 일도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후발 제국주의국가인 독일은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 등의 국가가 오랫동안 유럽의 '바깥'에서 자행해 온 것과 동일한 행위를 단기간에 '안'을 향해 터뜨린 것에 불과"(p.191)한 것이다. 그러니까 "나치즘은 유럽 문명의 외부에서 밀어닥친 '야만'이 아니라 유럽 문명 내부에서 배양된 야만이 분출한 것이었다."(p.193) 그는, 그 온갖 균열 속에 있는 '문명' 세계로 생환해와서 그 문명세계의 자기 모순을 짊어지고 새로운 보편적 문명의 구축, 인간의 척도를 다시 세우는 일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서경식은 레비의 무덤을 찾아가면서 차츰 '수치의 감각'을 만나게 된다. 먼저 그는 레비가 독일인을 이해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성실하고 평범한 독일인들. 재난이 끝나고 만난 독일인들. 그들은 한결같이 우리는 몰랐다고 말하고, 책임을 회피한다. 그는 개인으로서 '죄'는 없더라도 자신이 독일인임을 수치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때야 비로소 피해자와 가해자가 동일한 평면 위에서 서로 마주한 채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혈통적 문화적 의미에서 독일 민족의 일원임을 수치스러워 해야 한다는 건 아니다. "자신들에게 친숙한 생활양식이나 사고방식 중 무엇인가가 나치즘의 기반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나 불안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치즘을 낳고 키우고 묵인하고 지지하며 그것에서 이익까지 얻은 독일 국민의 일원으로서 느끼는 치욕감, 그 감각에 가능한 한 민감할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은 자세야 말로 "인간으로서의 원칙적인 수치심"을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과 공유하고 그들과 정서적으로 연대할 수 있는 전제다. 그런데, 일본군국주의와 일본 인민은 별개다'라는 말을 중국인 전쟁 피해자에게서 들었을 때, 일본인들은 어떠했나? "그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태연해하는 것이 아닌가"(p. 213)
그러는 사이, 그는 수치의 감각을 느끼게 된다. "20세기는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 그중에서도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경험한 미증유의 정치 폭력의 시대였다. 희생자의 총수는 약 1억 7천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이와 같은 폭력의 기억 자체가 폭력으로 위협받고 있다. 프리모 레비 같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도 김학순 할머니 같은 과거 '위안부'들도 모두 이 폭력의 세기에서 살아남은 귀중한 증인이다. 하지만 증인들은 자기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고 표현 가능성을 초월한 경험을 증언해야만 한다. 이해 불능의 경험을 이해하고, 표현 불능의 경험을 이해하고, 표현 불능의 상황을 표현하고 전달 불능의 상념을 전달한다는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부조리하게도 증인들에게 부과된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증인들은 부당한 의심과 무관심의 시선에 둘러싸여 고립된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왜?", "정말?", "도무지 믿기지 않아." 무신경한 수많은 질문들. 그렇다, 그것은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그들과 그녀들은 그 믿기지 않는 일을 희생자다. 당신들을 믿게 할 의무를 희생자에게 부과해야 한다는 말인가?" (p. 247-248)
그러는 와중에 독일에서는 '독일만 나쁜 것이 아니야'라는 요지의 '역사가 논쟁'이 일었고, 아마도 레비는 "아우슈비츠를 상대화하려는 사람들의 대두, 그 뻔뻔스러운 목소리를 환영하는 수많은 대중의 존재에 견디기 힘들 정도의 불안과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레비는 자신이 진짜 증언자는 모두 죽었으며 자신은 진정한 증언자가 아니라는, 인간으로서의 수치심을 느끼기 시작한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누구나 카인인' 강제수용소의 진상이 실은 수용소 바깥에서도 진실이었으며, 더욱이 그것이 유대인의 국가 이스라엘이 증명하고 있다는 현실 앞에서 끝을 알 수 없는 허무에 빠졌"을 수도 있다.(p. 269) 나 역시 그들에게서 자유로울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맨 위에 인용한 글을 읽다 울어버렸다. 우리나라가 베트남에서 저지른 일, 또 그 이전에, 나도 모르는 사이 우리 역사가 저지른 일들이 생각났다. 전 모르는 일이에요. 제가 한 게 아니잖아요. 믿을 수 없어, 그런 일이 있을리가. 아무렇지 않게 하는 그런 말들이 누군가를 계단 저 위에서 밀어내고 있는지 모른다.
이 여정의 끝은 레비가 젊은 시절 올랐던 토리노의 정다운 산에 대해 뜬금없는 이야기로 끝난다. 친구 산드로와 함께 산을 오를 적에 레비는 "건장하고 자유로운 자신을 느끼게 하는 맛, 잘못을 저지를 자유, 자신이 운명의 주인임을 느끼게 하는 맛"을 느꼈다. 그는 길을 잘못 들어 노숙을 하게 되어도 "길을 잘못 드는 비용조차 치르지 않는다면, 스무 살이나 먹은 보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에게 그 산은 "무구한 우정, 정의와 자유, 이상주의와 극기주의, 자신이 운명의 주인임을 느끼는 기쁨.." 그 모든 것의 상징이었다. "계단 아래의 어두운 공간으로 몸을 던진 순간, 그 준령들의 눈부심이 섬광과 같이 프리모 레비의 뇌리를 스쳤을 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그 순간의 빛을 온몸으로 받기 위해서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 안에서도 또 아우슈비츠 이후의 폐허에서도 '인간'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 없었고, '인간이라는 척도'의 재건이라는 힘든 과제에 자기 몸을 옭아맸던 것이다."(p. 281) 나도 그렇다. 읽는 동안 고통스러웠으나 인간으로서의 수치를 앎으로써 나도 레비나 서경식이 고민했던 거기에 서 있을 수 있었다. 그 순간의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