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스타 - 취향과 지향 사이
영화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책이든 가끔 이거 참 좋더라, 라고 이야기하기 꺼려질 때가 있다. 인정하고 나면, 나의 촌스럽고 나쁜 의미의 순진한 취향을 인정하는 셈이라 한사코 세련되고 '프로그레시브'하고 싶은 지향과 실제 취향의 간극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좋다, 소리는 슬그머니 목 뒤 어디쯤 숨겨놓고 괜히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세련되지 못한 기술이라든가, 허술한 소재라든가, 비현실성이라든가, 정성이 덜 들어간 세트라든가 그런 걸 트집잡는다. '라디오스타'를 보는 동안, 너무나 즐겁게 웃다가 또 울다가 마음이 훈훈해진 채로 마지막 장면을 보아놓고는 누구에게도 그 영화 좋더라, 하고 말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에 시달렸다. 에이, 중간에 동강에서 래프팅 하는 사람들, 부감화면으로 영월 지역 보여주고 그러는 거, 너무 작위적이잖아. 무슨 영월관광홍보 영화도 아니고 말야. 그런 풍경 장면 하나에도 카메라에 무슨 감정이 있어야지, 하여간 엉성해, 엉성해, 이러면서 아직도 붉은 눈을 슬쩍 감췄다.
한물 간 스타, 그의 후줄근한 매니저, 그 둘은 20년 지기다. 한물 간 스타와 그런 그의 매니저라는 것을 서로 모른 체 하기 위해 여전히 스타인 체, 여전히 절절 매는 매니저인 체하고 있는 둘은 3개월 후면 다른 지역 방송지국과 통폐합할 지방 방송국의 DJ가 된다. 처음엔 듣는 이도 없을 테니, 하는 생각으로 원고도 없이 막 진행한 그저 무성의한 즉흥 방송이었으나, 요샛말로 엽기방송이 된 이 라디오 프로그램은 인터넷 다시 듣기를 통해 이른바 대박을 친다. 집 나온 다방 아가씨가 엄마에게 눈물로 전하는 비 오는 날 부침개에 대한 그리움, 거기에 얹은 미안함, 고스톱을 치던 할머니들이 전화를 걸어 누구 말이 옳은지 가려달라 청하고, 꽃집 총각의 사연은 영월 시내 모든 사람들이 짝사랑 그녀에게 꽃 한 송이를 전하는 전령이 되게 한다.
DJ는 손님이 없어 문 닫게 생겼다는 병원 간호사에게는 뱀을 풀라고 하고, 취직에 필요한 자격증이라고는 군대에서 딴 태권도 자격증과 운전면허증이 전부인 실업자에게는 태권도장 차량 기사 자리를 권하고, 서울 가서 소식없는 아들에게 들리지 않을까 봐 더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위로한다.아무도 귀 기울여주지 않던,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그들의 삶을 어루만져주기에 한물간 톱가수만큼 적당한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게다가 그들은 아직도 그를 톱스타로 기억하고 있고, 감히 톱스타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 곁에 있어준다는 것에 감격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사람은 바로 곁에서 서로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해주던 매니저와 스타다. 스타가 없으면 매니저도 없고, 매니저가 없다면 그는 더이상 스타가 아니다. 그게 그 단 한 사람의 스타일망정 말이다.
TV 드라마로 족하다든가, 너무 뻔한 갈등이라든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인생은 대부분 그렇게 유치하고 뻔하니까. 제 아무리 애절한 사랑이야기라도 줄거리는 다 비슷한 것처럼. 영화를 보는 내내, 영화는 감독의 것일까, 배우의 것일까. 그런 생각을 했다. '왕의 남자'로 이른바 스타감독이 된 이준익 감독의 모습이 그 매니저 같고, 그 톱스타 같고, 그 열정 가득한 아마추어 록밴드 '이스트리버' 같아서 말이다. 어떤 영화는 배우의 영화가 되고, 어떤 영화는 감독의 영화가 되겠지만, 모든 영화가 그 영화를 만드는 감독 이상이 되는 경우는 없는 것 같다. 대학생 때 아이가 생겨 결혼을 하고 무엇이든 밥벌이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준익 감독, 외화를 수입해 한번도 흥행해본 적이 없는 이준익 감독, 제작자로 나선 후 만든 영화가 계속 실패하는 이준익 감독, 그런 감독의 모습이 영화 속 내용에 계속 겹쳐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대책없이 낙천적인 그가, 그런 그를 계속 믿어주며 뒷받침해주었던 사람들이, 그래서 결국 '왕의 남자'로 '인생역전'에 성공한 후에도 실패했을 때와 다르지 않은 웃음을 웃는 그가 자꾸 겹쳐졌다. 난 그가 수입해서 쫄딱 망한 영화 가운데 '산타 상크레(성스러운 피)'와 '블루벨벳'을 보았다. 둘다 프로그레시브한 이른바 예술영화다. '산타 상크레'에서는 코끼리 한 마리가 죽어 넘어지자 동네 사람들이 우~ 달려들어 다 베어가는 바람에 순식간에 뼈만 남는 장면만이, '블루벨벳'은 파란 하늘, 하얀 담장 너머로 노란 해바라기가 바람에 한들한들 서 있던 첫 장면에서 땅에 떨어진 잘린 귀로 이어진 후 내내 초지일관 어두컴컴했던 배경밖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난 아직도 그의 영화가 좋다, 라고 화끈하게 이야기하기 쑥스럽다. 아직도 세련되지 못한 내 취향을 인정하지 못할 만큼 유치한 게다. 하지만 그가 산타 상크레나 블루벨벳 같은 영화가 아니라 앞으로도 '왕의 남자'나 '라디오스타' 같은 영화를 만들기를 남몰래 바란다.
청룡영화제에서 배우 안성기와 박중훈이 공동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고 오버라고 생각했다. 안성기, 박중훈이라면 기대하는 만큼의 연기가 있고, 어느 영화에서든 그만큼은 할 것이므로. 남우주연상은 기대 이상을 한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중훈과 안성기에게 남우주연상을 주는 건, 누구에게도 욕 먹지 않겠다는 상업 영화상의 전략일 뿐, 결코 공정하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생각을 바꿨다. 기대가 적을수록 가능성이 많아지는 주연상은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기대하는 그만큼을 해준 그들은 상으로 칭찬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 기대치는 다른 어떤 배우에게 거는 것보다 크기 때문에. 과거에 아무리 비슷한 연기를 했다고 하더라도 안성기가 아니었다면, 박중훈이 아니었다면 이런 감정을 전해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감독이 칭찬받아 마땅한 또 하나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