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세상은 적막했다

양화 2006. 12. 10. 17:25

 

* 그림 상태가 좋지 않으나... 관아재 조영석의 '설중방우도' *

 

그 뒤로 성운은 7년을 더 살았지만 세상은 적막했다. 나이가 많아서도 아니요, 부귀를 누리지 못해서도 아니었다. 다만 세상에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깊은 밤 술동이를 다 비운 뒤 짧은 시 한 수를 짓고 고개를 들어보면, 장공에 달만 덩그러니 걸려 있을 뿐 공허했다. 어느 밤에는 시를 짓다가 문득 그가 생각나는데 볼 수가 없어 그 처연한 심정을 지하에 있는 벗에게 부치기도 하였다.

 

그나마 다행은 내 목숨이 오늘내일하나니       所恃吾衰朝暮死

지하에서 자네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것이네     重逢泉裏眼終靑                                 p. 99

 

거문고 줄 꽂아놓고, 이승수 지음

 

가끔 눈물샘이 고장난 게 아닐까 생각을 하곤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 삶의 정령 같은 몸 속의 모든 물질들이 고갈되면서 눈물샘도 말라간다는데, 시도때도 가리지 않는 눈물로 망신이 뻗친다. 나의 누선을 자극하는 것은 가만히 생각하면 아름다운 관계에 대한 것일 때가 많다. 그것도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더 많은 사람들의 관계에서 말이다. '일 포스티노'의 우체부와 시인, '씨네마천국'의 영사기사와 꼬마처럼. 그러니 애초에 이 책을 잡지 말았어야 했다. 배경음악으로 엔니오 모리꼬네를 들은 게 잘못이다. '옛사람의 사귐'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승수 선생의 이 책에는 때로는 시대를 초월하고 때로는 국경을 넘나들고 때로는 나이를 뛰어넘는 아름다운 관계들이 꽉 차있다. 저자의 감성어린 문체로 그들의 안타까움과 사랑과 그리움과 깊은 이해를 그렸지만, 저 담담한 말에 그만 눈물이 쏟아졌다.

 

저자는 우정을 강조하는 사회를 아름답지 않다고 감히 말하며 우정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은 "신분과 직업, 성별과 국적을 초월한 관계"가 많고, "영속적인 연대감이나 결속보다는 순간의 신뢰와 합일을 중시"했으며, "서로의 사유와 삶을 구속하지 않고 서로를 자유롭게 해주려는 관계"에 초점을 맞추었다. 우정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는 오성과 한음, 이항복과 이덕형의 이야기에서조차 저자는 공통점보다 차이점을 찾으려 애썼다. 유자와 불자(나옹화상과 이색, 양사언과 휴정), 학문의 지향이 다른 이들(이황과 이이), 정치적 입장이 달랐던 이들(정몽주와 정도전, 김상헌과 최명길), 스승과 제자(이익과 안정복), 남성과 여성(허균과 매창), 둘 사이의 거리가 하 멀어 일생을 통해 단 두 번밖에 만나지 못한 이들(나빙과 박제가)도 있다.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정몽주와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이었던 정도전이 명나라 사신으로 가던 배 위에서 고금의 흥망사를 떠올리며 한 잔 술에 취해 갑판에 벌렁 누워 별빛을 바라보다 나란히 잠드는 모습, 속리산과 지리산에 묻혀 각기 은거하던 중에 성운의 편지를 전하러 온 사람의 눈 속에서 성운의 모습을 보며 쌓였던 정에 막혀 편지도 못 쓰고 있는 지리산의 조식 모습, 떠나려는 이이를 날씨를 핑계로 이틀이나 붙잡고 때론 함께 한담을 나누고 때론 경전을 앞에 두고 깊은 뜻을 따지고, 밤에는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술을 마시는 도산의 이황 모습, 청의 포로로 잡혀있던 곳에서 한치의 양보 없이 자신의 입장을 시에 실어 고요하게 격론하던 최명길과 김상헌의 모습, 세칸 집에서 새우젓과 무김치 반찬의 두 끼 식사를 하며 가을과 겨울 사이 단 하룻밤을 함께하고는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하면 서로 못 보는 것이 무슨 한이겠냐며 평생 편지로 대화하며 서로의 책에 흔적을 남긴 이익과 안정복의 도타운 정, 단 한 번의 만남 후 서로를 꿈속에서 만나며 평생을 그리워했던 박제가가 나빙의 위패 앞에서 목놓아 우는 모습.

 

같은 것을 공유한 사람들이 서로를 좋아하고 그리워하기는 쉽다. 하지만 다른 취향과 지향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해하고 신뢰하고 그래서 더이상 말이 필요없게 되고, 그 단절 속에서 고독이 아니라 자유를 찾은 이들, 이 책 속의 모든 인물들이 날 울리는 이유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너무 아름다운 관계들, 그 관계를 소박하게 장식한 아름다운 한시들. 문득 깨달으니 하늘에서 내리는 분분한 꽃비 속에 앉아있다.

 

역시 나를 울린 슬프고도 아름다운 한시 하나 더.

 

공문이 적막하니 늘 집이 그리웠지              空門寂寞汝思家

부처님께 합장하고 구화산을 내려가렴         禮別雲房下九華

대나무 난간에서 죽마 타고 장난치며           愛向竹欄騎竹馬

예불과 불법 공부 언제나 뒷전이었지           懶於金地聚金沙

시내에서 물 긷다가 달 맞던 일 그만이고      添甁澗屋休招月

주전자에 차 달이며 꽃 장난도 다했구나       烹茗구中罷弄花

잘 가거라 아가야, 울지 마라 아가야            好去不須頻下淚

늙은 중에게야 안개와 노을이 있지 않으냐    老僧相伴有煙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