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적절한 균형

양화 2012. 12. 31. 13:44

 올해의 소설로 꼽힐 또 한 권의 소설. 읽은지가 오래돼서 감상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싶지만 올해를 넘기고 싶지 않아 일단 정리해둔다.

 

 

무려 900쪽을 넘는 방대한 분량, 다양한 배경을 가진 수많은 등장인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술 읽힌다. 인도 소설은 이 책 전에 "Q&A"(영화로 나온 후에는 "슬럼독밀리어네어"로 제목이 바뀌었다)를 읽은 게 다지만, 그리고 아무래도 재미있는 책이 선별되어 들어와서겠지만, 늘 흥미진진 재미있다. 왤까, 잠깐 생각해봤는데, 계급간, 계층간, 종교간, 가족간 관계가 복잡한 사회일수록 훨씬 많은 서사가 생산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다. 물론 작가의 역량도 문제겠지만.. 여성차별의 사회 구조 속에서 혼자 살기를 선택한 여성이 감내해야 하는 갈등과 고통, 소수종교인으로써 사회 변화 시기마다 고초를 겪거나 오해를 받아야 하는 조로아스터교, 이슬람교도, 최하층 계급임에도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 불가촉천민, 구걸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도 모든 일에 감사하는 인도의 걸인들... 이들이 이 책의 주인공들이다. 이들 가운데 누구도 주인공이랄수도, 어느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랄 수도 없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듯한 끔찍한 고통과 가혹한 삶의 조건 속에서도 명랑(?-삶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활기 정도라고 해두자)하게 항변이나 원망 한 번 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이들 주인공들의 삶을 보고 있노라면, 삶에 대한 불평이 거둬지며 숙연해진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삶이 갖고 있는 존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마치 디나가 만드는 갖가지 색과 모양과 섬유의 조각보처럼. 책에서는 여러 번 균형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그 부분에 이 책의 비밀이 숨겨져 있으려니 싶어 주의깊게 옮겨두었다.  

 

"나를 교육시켜 준 감미로운 잉크가 독약으로 변한 거죠."

"그래서 어떡하셨어요?"

"그런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하겠소? 그냥 받아들이고 사는 거죠. 생존의 비결은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거라는 걸 잊지 마시오. 인용하자면, "모든 것들은 무너지고 다시 만들어지며 그것들을 새로 만드는 일은 즐겁다.""

"예이츠인가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선을 긋고 구획을 정해서 그것들을 넘지 않으려고 하면서 살 수는 없는 거요. 때로는 실패를 성공의 징검다리로 삼아야지. 희망과 절망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해야 하죠."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이 한 말을 되새겨 보았다.

"그렇지, 결국은 모든 게 균형의 문제지." 336

마넥과 바산트라오

 

"이제야 뭔가를 아는구나. 그게 바로 비결이야. 네 감각들을 딴 곳으로 돌리는 거지. 그것에 관한 내 이론을 말한 적 있던가? 우리의 시각, 후각, 미각, 촉각, 청각 모두는 완벽한 세계를 즐기기 위해서 맞춰져 있지. 그러나 세계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한 감각들에다가 가리개를 씌워야 하는 거야." 350

마넥과 아비나시

 

디나 아주머니는 그러한 기억을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가. 어머니와 아버지 또한 옛시절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옛날 사진을 하나씩 사진첩에서 꺼내 사랑스럽게 살피다가 그것이 다시 흐린 기억 속으로 사라지면 슬프고도 행복한 미소를 짓곤 하셨다. 비록 때로는 필요에 따라서 그런 척하지만, 사실 어느 누구도 기억을 잊어버릴 수 없다. 기억은 영원하다. 슬픈 기억들은 시간이 지나도 그래도 슬픈 채 남아 있지만, 행복했던 기억들은 결코 똑같은 환희로 재현되지 않는 것이다. 기억은 자신만의 독특한 슬픔을 낳는다. 시간이 슬픔과 행복 모두를 고통의 원인으로 바꿔놓는 건 너무 불공평해 보인다.

그렇다면 기억을 간직하는 것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결국은 모두 부질없는 짓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잡화점을 보라. 아니면 디나 아주머니의 삶, 기숙사와 아비나시 선배, 그리고 불쌍한 이시바 아저씨와 옴을 보라. 아무리 행복한 시절을 기억한다고 해도, 아무리 그리워하고 동경한다고 해도 불행과 고통은 조금도 바뀌지 않는다. 사랑과 관심과 배려와 나눔은 아무것도, 아무것도 남기는 것이 없다.

울음을 터뜨린 마넥이 애써 소리를 죽이려고 하자 가슴이 울렁거렸다. 모든 것이 나쁘게 끝나고 만다. 미치거나 자살을 해서 완전히 깨끗해지지 않는 한, 괴롭히고 비웃는 기억 때문에 상황은 악화될 뿐이다. 기억하지 못한다면 더 이상 고통도 없을 것이다. 489

 

그는 한숨을 쉬며 벽에 기댔다. 정오밖에 안 됐지만 그는 벌써 기진맥진했다. 비록 수금을 일찍 끝낸다고 하더라도 갈 데가 없었다. 아침 아홉 시부터 밤 아홉 시까지 그의 방은 야근을 하는 공장 노동자에게 세를 주었다. 거리를 방랑할 수밖에 없었던 이브라힘은 집으로 돌아가 노동자의 냄새를 맡으며 잠 잘 시간이 될 때까지 공원 벤치나 버스 정류장 난간에 앉아 있거나 거리 구석의 노점에서 차를 마셨다. 이게 사는 건가? 아니면 잔인한 농담인가? 그는 더 이상 운명의 저울이 공평한 균형을 이루리라고 믿지 않았다. 냄비가 비지 않고 며칠 밤낮을 지낼 수 있는 음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조물주로부터 바라는 것이 없었다. 512

 

디나의 이불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오레보아 수출 회사의 주문량을 재봉사들이 열심히 채우자 헝겊 조각들이 건강한 강의 충적토처럼 쌓였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면 그녀는 그것들 가운데서 가장 좋은 것들을 골라서 붙였다.

"옛날 것들 하고 완전히 다른 종류네요. 괜찮을까요?" 마넥이 물었다.

"이불 비평가께서 또 시작이시네." 그녀가 투덜거렸다.

"정사각형에 삼각형 그리고 다각형이라, 헷갈리겠는데요." 옴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예쁘겠는데." 이시바가 권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님 계속 연결하십시오. 그게 비결입니다. 함께 엮어 놓을 때까지 헝겊 조각들은 모두 별 볼일 없어 보이니까요."

"그럼요. 쟤들은 이해를 못한다니까요. 아 참, 벽장에 헝겊 조각들이 많은데 혹시 만들고 싶은 게 있으면 써요." 디나가 말했다.

584

 

이시바가 가볍게 한 말이 마넥에게는 차가운 비처럼 쏟아졌다. 그의 기쁨이 등불처럼 꺼져 버렸다. 미래가 과거가 되고 모든 것이 공허하게 사라진다면, 뭔가를 구하기 위해서 뒤돌아볼 때 과연 무엇을 움켜쥐어야 할까? 남은 것이라고는 약간의 실, 천 조각들, 황금 같은 시간의 그림자들뿐인가? 시간을 바꿔서 과거를 미래로 만들고, 현재라는 변화무쌍한 선을 넘어서 과거로 변하는 미래를 멈출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702-703

 

"그렇습니다. 하지만 걱정마세요. 아름다운 광경이니까요. 샨카의 여행길을 제대로 배웅하고 나면 좋은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겁니다. 더 이상 샨카에게 손수레가 필요없기를 바라야죠. 불타는 장작을 보고 나면 난 항상 이런 기분이 듭니다. 완벽함과 고요함, 그리고 삶과 죽음의 완벽한 균형 말입니다. 사실, 이런 이유로 난 모르는 사람들의 화장도 찾아갑니다. 장례 행렬을 발견했을 때 시간이 나면 따라가죠." 724

 

못 두 개를 박고 줄을 치자, 상징적인 칸막이가 완성됐다. 그녀는 뒤로 물러서서 커튼의 양쪽을 살폈다.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상징이 많은 법이었다. 732

 

"거지 왕초가 완전히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녀가 말했다.

"선과 악의 문제를 어떻게 똑 부러지게 알 수 있겠소. 내 말은 저울이 일단 공평해 보인다는 거요. 사실, 어제 아침에 거지 왕초가 오는 걸 보고서 나도 도움을 청할까 생각 중이었소. 어디 좋은 위치에다가 자리를 마련해달라고 말이오. 그런데 살인범이 먼저 그를 해치웠죠." 792

 

"무슨 그런 말을 하시오. 그 작자가 살인을 할지 몰랐잖소"

그녀의 손을 두드리는 그의 손의 손톱에 때가 낀 것이 보였다. 몇 달 전이었다면 그녀는 역겨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고마웠다. 해롭지 않은 파충류처럼 주름지고 비늘이 낀 그의 피부에 그녀는 놀라면서도 슬펐다. 왜 그렇게 그를 미워했을까? 사람에 관한한 이치에 맞는 유일한 감정이란, 삶을 인내하는 능력에 대한 놀라움과 결국은 절망하고 마는 슬픔이다. 결국 모든 게 나쁘게 끝나고 만다는 마넥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793  

 

수많은 인물이 나오지만 거기에는 나쁜 사람도, 착한 사람도 없다. 거의 마지막 부분의 인용처럼 "사람에 관한한 이치에 맞는 유일한 감정이란, 삶을 인내하는 능력에 대한 놀라움과 결국은 절망하고 마는 슬픔"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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